2015년 5월 6일 수요일, 맑음
“엄마, 시우가 어린이날 치과에 가서 충치 치료를 받았어요. 마취주사에 드릴에 끌에 꿈쩍도 않고 신음소리 한번 안 내고 잘 해냈어요. 의사선생님들이 ‘이런 애들만 오면 일이 너무 쉽겠소.’라며 칭찬이 대단했어요.” 간밤에 온 아들의 아들 자랑 문자메시지.
그 형에 그 동생이다. 3년 전 시아가 서울에 왔을 적에 우리집 치과 가정의로 모시는 곽선생네 서정치과에 갔었다. 충치가 두 개나 있어 곽선생님이 할머니인 나에게 걱정부터 하였다. “선생님, 어떡하죠? 시아가 많이 아파할 텐데?” 어른도 경기를 할 이 치료를 다섯 살짜리가 어떻게 견디나 안쓰러우셨던가 보다. “우리 시아는 잘 견딜 거에요, 걱정 마세요. 그렇지 시아? 참을 수 있지~~?”
그런데 정말 시아는 찍소리 한번 안 내고 잘 참았다. 곽선생님도 나도 한숨을 돌리며 한참이나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시아가 “선생님, 나는 치과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재미있어 자꾸 오고 싶어요.” “헐???” “헐???” 두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눈물이 글썽거리면서도 다섯 살자리가 하는 말에 곽선생님과 나는 한참이나 웃었지만, 아이의 진지하고 비장하던 표정으로 미루어, 어른들의 그 웃음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저 두 아이로 하여금 자기 감정을 저토록 절제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일까? 한참이나 생각해야 했다. 스위스에서 받은 유아원과 유치원의 교육일까? (치과에만 가면, 주사기만 보면 아이들이 난리를 치는 소동을 늘 보아오던 참이어서 하는 말이다.) 주변에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으려는 저런 배려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 며느리의 성품일까?
나 어렸을 적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장례가 치러지고 하던 TV 중계에서 재클린 여사가 “오우, 노!”라고 소리치던 장면과 그 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철저히 절제된 표정을 보이던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면서 “나는 어떻게 살라고?”라며 대성통곡에 기절하면서 평소의 억눌린 감정을 통째로 풀어놓으면 곁에서 아무도 못 말리고 말릴 엄두도 못내는 장면들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절제된 슬픔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나 어린 여자인 내 뇌리에 깊이 새겨졌었다(재클린 오나시스의 탄생과 더불어 그 환상이 산산히 부서지기도 했고 1994년, 64세에 임파선 암으로 별세한 그니의 마지막도 씁슬했지만...)
그런데 그렇게 악다구리로 대성통곡하던 우리네 아낙들은 홀어미로서의 숙명을 말없이 받아들이고 악착같이 일해서 자식들을 키우고 시부모 섬겨가며 여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며 원통함과 괴로움을 풀어버린 까닭일까? 인생은 참으로 묘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이다.
10시에 떠나던 지리산은 “돌아오실 때쯤이면 진초록의 건강한 몸 기다릴게요!” 라면서 서울로 가는 내게 손을 흔든다. 신탄진 휴게소에서 싸간 점심도 먹고 한 10분 쉬고서 막힌 데 없는 고속도로를 달려 3시 30분경 서울집에 도착하였다.
빵기가 덮을 요와 이불을 테라스에 꺼내서 일광욕을 시키고, 집안 청소를 하고(보스코는 오자마자 주보원고를 쓴다는 핑계로 책상에 앉고), 5시경 ‘수락산공항터미널’에 도착한 빵기를 마중 나가 그의 무겁고 많은 가방들을 싣고 돌아와 “빵기네집”으로 들어섰다.
마흔두 살의 큰아들이 널따란 골목에 차를 세우고 크고 무거운 가방을 끌고 들어오는 집. 빵기가 네 살 무렵 아장아장 걸어서 이사 들어온 집. 이 집에 이사 와서 가져서 낳은 둘째 아이 빵고가 서른여섯이니 37년째 사는 집이다. 우리가 마련한 첫 집이자 이승에서 떠나는 날까지 살다가고 싶은 마지막 집이기도 하다.
“빵기야, 오래된 집이어서 참 좋지?” “예. 그래서 이 집은 정말 집이 집 같아요.” 마당에 사는 숱한 초목들까지 한 식구 같은 우이동집. 자연 속에 파묻힌 게 매력이라면 매력인 터에서 우리는 잠시 더 머물다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