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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조영규] “살길 찾기 위한 어설픈 타협으론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 조영규
  • 등록 2016-05-27 16:18:44
  • 수정 2016-05-31 19: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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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년경 ~ 1525년 5월 27일)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혁명가였다. 종교개혁 당시 중부 독일의 봉건 지배자들에게 저항함으로써 당시 교회개혁을 부르짖던 마틴 루터와 나아가 가톨릭교회 모두와 전선을 형성했다. 이후 뮌처는 1525년 플레바이안에서 농민들의 봉기를 주도했다가 프랑켄하우젠에서 붙잡혀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독일 농민전쟁은 1524년부터 1525년 사이 중부 유럽의 독일어 권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농민들의 항쟁이다. 독일 농민 전쟁에 가담한 30만여 명의 가난한 소작농 가운데 10만여 명이 귀족들에 의해 학살되고 진압 당했다. 농민들은 포병, 기병도 없이 빈약한 무기를 들고 있었으며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농민들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틴 루터는 농민전쟁을 비난하고 귀족의 편에 섰다.


중세 다수의 소작농들은 과다한 소작료와 세금으로 인해 생활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그러던 중 이들은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과 부의 독점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불공평한 사회가 개혁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농민들의 사회개혁의지는 1524년 독일농민들이 영주들의 착취에 맞서 싸운 독일농민전쟁으로 실천되었고, 토마스 뮌처가 이 민중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농민군들은 마틴 루터의 지지를 열렬히 기대했으나, 정작 마틴 루터는 그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아닌 자들 (unchristian)’이라 규탄하고 탄압했다. 이로 인해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군들은 마틴 루터를 따르는 영주들에 의해 학살당했고 뮌처 자신도 491년 전 오늘 5월 27일 처형당했다.


당시, 사고하는 인간은 더 이상 사이비 주교나 신부, 수사들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계몽주의가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농부들 사이에서는 거짓말과 착취를 일삼는 주교와 신부들에 저항하자는 전단이 돌았다. 그들은 중세의 참혹한 식량난과 가혹한 생존의 현실 가운데에서 신의 이름을 빌어 민중들을 기만하고 학대하고 억압하던 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고발했다. 


반란에 실패한 농민들은 16세기 이후 합리적 시민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더 이상의 불만을 제기하지 마라! 그리고 내세에서 위안을 받아라!” “가련한 영혼들이 구원받는 길은 행복을 저 세상으로 연기하는 일”이라는 교황의 강론을 들어야 했다. 


▲ 농민전쟁 연작 - 포로들, 케테 콜비츠


이후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는 <타르튀프>라는 인물을 통해 ‘금욕적인 척하면서 숨어서 음탕한 짓을 일삼는 탐욕적인 속물들’을 풍자하는 작품을 선보이며 교회권력에 대한 은밀한 공격을 전개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성과 속의 분열은 가속화 되었고 21세기 현대의 교회는 지금 자기 방향성에 대한 혼란에 직면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운영되었다. 그런 교회권력의 해체는 새로운 이념과 체제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회주의 혁명과 그 대안으로 제기되어 수정된 자본주의간의 대립으로 한 세기를 보내고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아래 경제·사회·문화 전반의 은밀하고 고도화된 착취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권력에 과잉충성하거나 고도화된 자본의 충실한 협력자로 일하고 있다. 대학과 병원, 건축과 금융계 등에 은밀하게 자신의 빨대를 꽂고 거룩함으로 위장된 ‘교회사업’으로 치장하여 신자들의 고혈을 빨고 자신들의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루터는 당시 자본을 가진 자들의 이해를 충분히 대리하며 자신의 논거를 전개해 나갔고 결국 그 역시도 가난한 백성과 농민들의 삶과는 괴리된 노선으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출발부터 잘못된 설정을 한 것이다. 예수가 설교한 복음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였지 부유한 신흥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변호사의 역할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교회개혁에 대한 목소리들이 난무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관심’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운운하며 전문가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하지만 그런 회의에 정작 가난한 이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운운하며 종교인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말하지만 정작 교회가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할 땐 나서는 사람이 없다. 입으로만 하는 멀리 있는 ‘신학’과 ‘신학자’는 결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정의로우니 나를 따르라’거나 ‘이해하지 못하니 더 이상 발전이 어렵다’고 쉽게 말하는 학자는 가난한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지 못한다. 


500년 전 토마스 뮌처가 왜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고 실상은 같은 흐름이었던 소위 교회개혁자 루터에게 등을 돌렸는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루터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로를 찾기 위해 세상과의 어설픈 타협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뮌처는 그의 사망 500주년을 기점으로 재평가 되어야 하며 21세기 ‘혁명의 신학자’로 복권되어야 한다.



[필진정보]
조영규 : 한국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올바른 신앙실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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