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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0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6-04 08: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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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1열왕 17,17-24)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집주인 여자의 아들이 병들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해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엘리야는 여자에게 “아들을 이리 주시오.” 하며, 과부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무르는 옥상 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누였다. 엘리야는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집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하시자,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옥상 방에서 집 안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그러자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29)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셨나이다.


제2독서(갈라 1,11-19)
<하느님께서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복음(루카 7,11-17)

<젊은이야,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연중 제10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1열왕 17,17-24) 해설
<엘리야는 시렙타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어지신 하느님이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 준다>


이방인 과부에게 신세를 지고 있던 엘리야는 죽은 그 외아들을 소생시킨다. 사렙타 과부는 하느님을 엄격하고 잘못을 반드시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이 죽게 된 것은 바로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결과라고 여기고, 다름 아닌 엘리야가 자기에게 벌을 내려 자기 아들을 죽게 한 도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는 죽은 아이에게 숨기운을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복수를 일삼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고 용서하는 하느님이심을 증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들일지라도 죽어 멸망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음을 증명한다.


예수님께서도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당신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신다(참조. 루카 7,11-16).


사람이, 그것도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서글프고도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적과 예수님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부활로써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편(30) 해설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셨나이다>


“주님, 당신께서 제 목숨을 저승에서 건지시고 저를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습니다”(4절) 생명을 되찾고 사는 기쁨을 되찾은 사람이 감사드리는 이 시편으로, 전례에 모인 회중은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한다. 올바른 길로 돌아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과 성령을 힘입어 생명을 되찾는 기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제2독서(갈라 1,11-19) 해설
<바오로는 자기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와 특별한 부르심에 따라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바오로가 12사도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그의 사도적 권위에 끊임없는 의심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특히 유다인 출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이 서간의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참조. 갈라 2,1-2.6.17;1고린 15,1-3) 자기의 자율적인 위치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12사도 및 예루살렘 공동체와 친교를 맺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적 직분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았음을 무엇보다 앞세워 강조한다.


바오로는 회개하여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바오로가 전달하는 복음은 12사도가 전달하는 복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바오로 자신이 12사도와 접촉한 것도 자기가 전달하는 복음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자기가 설교하는 것이 정당함을 증명해 보이며 자신이 수행하는 사명과 12사도가 수행하는 사명이 똑같음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다인들에게 전달된 복음이나 이방인들에게 전달된 복음이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고 12사도와 바오로에게 위임된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을 보내어 모든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당신을 체험하게 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할 사명을 받는다.
 
복음(루카 7,11-17)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부활의 기적을 행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이 기적을 보고하는 루카 복음서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죄악으로 상처를 입은 인간 본성을 되찾아 주는 메시아 시대의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고 계심을 증명하는 데 있다(참조. 이사 61,1;35,5-6).


유다인들은 예언 말씀에 기초를 두고서(이사 26,19), 메시아 시대가 오면 그 때까지 죽은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결정적으로 회복될 때에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었다(참조. 에제 37).


적어도 일부 유다인들은 그런 사건을 육체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있었다(참조. 2마태 7,9-36; 다니 12,2-3). 그래서 메시아 시대는 엘리야가 다시 옴으로써 시작되리라고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함으로써(1열왕 17,23 이하와 비교), 복음서 저자는 아마도 예수님 안에서 그런 기대가 채워졌음을 지적하려 한 것 같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고, 예수님의 사명이 엘리야의 사명보다 훨씬 고귀함을 증명하려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부활하게 하되, 그저 단순히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새로운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수난을 겪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여 건너간다.


묵상


생동하는 만남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루카 4,25-26)


예수님께서 몸소 오늘 열왕기에 의한 독서를 해석하기 위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느님의 선택은 절대 자유로우며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의 사랑(당신과 생명의 친교를 이루어 주시는 사랑)은 땅 위에서 울타리나 경계가 전혀 없다.


사렙타는 아마 선택된 백성이 살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예언자 엘리야를 그 지방에서도 가장 가난한 과부 집에 얹혀살게 하신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 있는 것으로 땔감을 주워 모자(母子)가 죽기 전에 음식을 만들어 먹을 작정이었다. 그런 과부에게 엘리야는 도움을 청하면서,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 17,14)고 일러주었다. 그 과부는 예언자가 하는 말을 믿고 남은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예언자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과부와 그 아들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과부의 아들이 죽고 그 어머니가 심한 고통과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예언자를 시켜 그 아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당신만이 생명을 주고 지탱하게 하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임을 절실하게 체험하도록 하신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그 기적은, 단순히 죽은 아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방인 과부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불붙게 한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열왕 17,24)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하느님의 예언자를 따뜻하게 맞이한 이방인 과부가 자기 죽은 아들을 되찾는 큰 은혜를 입는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형편없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자기 먹을 것까지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당신 생명을 주실 것이다.


나인이라는 동네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죽은 외아들 때문에 슬피 통곡하는 과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약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시면 고통스러워서 못 견디시는 마음이다. 측은해하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마음은 창조를 일으킨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더러 ‘울지 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죽은 외아들을 되살려 주신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6) 예수님께서 만진 모든 것과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을 건네주시는 모든 것은 생명을 얻는다. 주님의 연민과 동정은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 힘없는 사람들은 서로 동정하고 나눌 줄 알아야만, 그리스도처럼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나인 동네에 사는 과부처럼 딱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주변과 세계 곳곳에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무정하고 메마른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리고 불쌍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돌리고 실천적으로 나눔의 행위를 보일 때, 비로소 생명이 전달되고 통한다. 쓰고 남은 것을 동냥하듯 던져 주는 것은 나눔의 행위가 아니다. 자기 소유를 나누어주고 마지막 남은 것까지,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누어 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의 행위다.


성찬례(미사성제)의 핵심은 그 나눔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것과 당신 자신의 살과 피와 생명까지 남김없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시는 나눔이다. 그리스도의 나눔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에게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그리고 자기 노동과 목숨까지 나눌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 사이에 흘러 참된 일치를 이루게 된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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