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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바닷물은 고기들이 다 먹어버린다!”
  • 전순란
  • 등록 2016-06-13 10:02:07
  • 수정 2016-06-13 10: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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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1일 토요일, 맑다 흐리다


비가 온다고 예보되었는데 오늘도 그냥 넘어간다. 밭에 앉아 풀을 뽑으려 해도 딱딱한 흙이 풀을 단단히 안고 놓아주질 않는다. 어느 생명이든 대지의 품에서 앗아내는 일은 힘들다. 초목은 그 뿌리로 대지의 젖가슴에 단단히 매달려 뽑혀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대지는 잡초니 채소니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을 감싸 안아준다. 호미로 안 되어 아예 낫을 휘둘러 뿌리를 찍어내는 내 횡포가 참 부끄럽고 죄스럽다.


올핸 자주 서울에 가느라 ‘옷갈이’를 미처 못하였다. 겨울옷을 상자에 넣어 옷장위로 올리고 겉옷은 3층 다락에 올려간 다음 여름옷을 가져다 옷장에 걸고 설합에 정리해 넣는 일이다. 여름옷이 걸리는 광경에 기분이 좋았는지 보스코가 선뜻 한 벌을 꺼내 입는다. 마당에 내려가 화초밭에 물을 주고 잔일을 해야 할 텐데 하필 순모바지에 모시남방이라니! “여보! 이따 마당 일 하려면 땀 흘리고 버릴 텐데 어떻게 모시남방을 입나요? 순모바지는 그때마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데? 풀물이 들면 지워지지도 않는다구요” 벗으라고 하자 그가 서둘러 입는 옷이 이번에는 다리미질도 안한 구겨진 옷! 44년간의 ‘교육’으로 안 되었으면 포기할 만한데도 단념 못하는 내가 더 한심스럽다.



세탁기를 두어 번 돌려 빨래를 했다. 해가 쨍쨍하지는 않지만 구름 속을 들락날락하는 새에 (유럽의 시로코 비슷한) 열풍이 불어 테라스에 넌 옷가지가 뽀송뽀송하게 말라간다. 저것들을 다리미질해서 상자에 넣고 다락에 올리면 또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


오후에는 식당채 앞 나무화단에서 매발톱, 파슬리, 팬지, 패랭이가 제 몫을 다했으니 가을에 화분으로 다시 데려와 주마 약속하면서 뿌리 채 뽑아 뒤꼍의 흙에 묻어주고, 화단에 새 흙과 거름을 채워 서울서 사온 사피니아, 바늘꽃, 백일홍과 제라늄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휴천재 입구 아취를 감아 올라간 능소화 덤불 속에서 식성이 한창일 물까치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소란하다. 사람이 바로 밑에서 화단 정리를 하고 있어 그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어미가 먹이를 물고도 감히 접근을 못하는 ‘보안정책’을 어린것들이 눈치챌 리 없고....




여섯시가 넘어 모기떼가 덤비기 시작하는 시각이지만 텃밭으로 내려가 정글로 변한 토마토와 오이 가지를 손잘하였다. 귀가 얼얼하게 물어제끼는 모기들한테 “그래, 내가 너희보다 덩치가 큰데 다 먹어치우기까지야 하겠니?”라며 버텼다. “바다에 아무리 물이 흘러들어도 넘치지 않는 까닭은?” 하고 묻는 선생님에게 “고기들이 다 먹어버려서!”라고 답했다는 그림이 생각나 혼자서 쿡하고 웃었다.





순 자르는 가위가 어딨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져 하는 수 없이 일손을 놓고 올라왔다. 간단한 저녁을 차려 들고 올라가자 “왜 플래시 입에 물고서 하시지?”라는 보스코의 볼멘 소리(아홉시에야 저녁밥 준다고)에 “아냐, 탄광 노동자들 이마에 쓰고 하는 작업모를 구하야겠어요”가 내 대답. 저녁을 먹고서는 낮에 세탁하여 말린 옷들을 다리미질하다 보니 자정이 가까워온다. 보름간 나들이한 대가가 톡톡하다.


오후에 빵고 신부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교에 탄자니아에서 온 사제가 한 명 있는데 사람이 워낙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친하게 지낸단다. 얼마 전 그의 수도회 형제 하나가 더 도착했는데 학비는 교황청이 대준다지만 생활비를 지원받기로 한 은인이 맘을 바꿔 곤경에 빠졌단다. 엄마 주변에서 은인을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저 1981년! 4년치 장학금인 줄 알고 온 가족이 로마로 이사갔다가 그게 일년치였다는 날벼락에 온 가족이 로마역에 구걸 나가야 할 판에 (고)김수환 추기경님이 추천편지를 써주셔서 독일 MISSIO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6년을 무사히 공부한 우리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대책을 찾아봐야겠다.


문하마을 아짐들의 접시꽃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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