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였던 한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 성공회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젊은이는 김조광수 감독이다.
10여년전 한 가톨릭 신자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회와 교회의 큰 벽 앞에서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했다. 그는 바로 동성애자인권운동가 고(故) 육우당이다. 당시 교회는 그의 죽음을 외면했고 동성애자 청년들의 울부짖음도 외면했다.
6월 26일 대구에선 퀴어페스티벌이 있었다. 시작부터 긴장감이 있었다. 퀴어페스티벌 전에 성적소수자 혐오집단이 대구시에 축제 취소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구시에선 이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26일 대구백화점 앞 광장과 동성로 일대엔 성적소수자 홍보부스에서 캠페인을 하고 있었는데, 성적소수자 혐오집단이 피켓을 들고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 시위를 했다. 경찰 병력들도 주위에 깔려 긴장감이 느껴졌다.
작년 대구 퀴어페스티벌에도 전국각지에서 퀴어단체들과 혐오집단이 왔었다. 축제 도중 혐오집단 측의 한 중년 남성이 생수병에 오물을 담아 뿌렸고 그 남성은 축제 후에 경찰에 검거됐다고 한다.
올해 퀴어 페스티벌은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고 한다. 퀴어 페스티벌에서 예수분장을 한 참가자가 성적소수자들을 응원하는 퍼포먼스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오후에는 혐오집단 사람들 몇몇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퀴어 페스티벌에 대해 가톨릭교회 측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10여년전 고(故) 육우당의 죽음을 외면한 교회의 태도는 여전하다. 마치 어지러운 일에 자신을 끼워넣지 말라는 태도인 듯하다. 어느 교구 정평위는 퀴어 페스티벌 지지 서명에 참가한 사람 때문에 교회 내부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퀴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이 퀴어는 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동성애 성향이 대표적이며, 생물학적 성을 바꾼 사람, 이성의 복장과 맵시가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남성이 여성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하거나, 여성이 남성의 맵시가 취향인 사람), 이성애와 동성애가 없는 사람, 양성애 성향의 사람 등을 뜻한다.
성적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남녀로 짝지어 준 것이 성경에 나와 있거늘 왜 동성애로 죄를 짓느냐’는 입장이다. 또 한국 전통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동성애는 병이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동성애 치료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동성애 치료는 19세기부터 이어온 잘못된 이론이다. 이후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 동성애는 더 이상 질병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결국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 ‘취향’인 것이다. 인류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에이즈를 옮긴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1980년대 혹은 1990년대에 어느 언론보도에서 나온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동성애 성향의 한 남성이 에이즈에 감염됐다고 보도했다. 에이즈는 감염된 사람들간 성관계나 수혈 등 혈액이동에 의해 전염되는 것이지 동성애와 연관성이 있는것은 아니라고 한다. 에이즈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콜카타의 복녀(곧 성인) 마더 데레사는 에이즈 감염인들을 안아주었다. 에이즈 감염인을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을망정, 그들을 외면하고 매몰차게 교회와 사회 밖으로 내쫓으면서 동성애는 에이즈 감염의 원인이라고 외치는 것은 모순이다.
성적소수자 혐오단체들이 동성애를 반대하고 혐오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교단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성적소수자들에게 가혹한 혐오를 보인다고 분석한다. 늘 그렇듯 한 집단에 위기가 찾아오면 소수자들을 희생자 삼아 공격하는 방식이다.
예수는 성적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도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라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도 예수는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는다. 백인대장이 사랑한 노예이야기에서 나와 있듯, 예수는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 말을 적극 받아주는 모습을 보인다. 백인대장이 사랑한 사람이 앓고 있었을 때, 예수는 가서 낫게 해주려고 했다. 백인대장이 갈 필요가 없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하자, 예수는 감탄하며 말로써 그 연인을 병에서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에이즈 희생자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성노동이라 불릴 수 없는 성매매 피해자들의 인권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도 기내 기자회견에서 성적소수자들에게 그리스도교회는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성적소수자들도 착한 의지가 있으면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했다. 교황은 작년 주교시노드에서 동성애 가족도 다루어 보자고 제안했고, 최근 권고 「사랑의 기쁨」에서도 동성애 가족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
사실 교황의 이런 발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교황의 발언은 이미 가톨릭교회교리서에 있는 내용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동성애는 죄이지만 차별해선 안 되고 교회에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다.
최근 이슬람에서도 동성애는 죄이지만 차별해선 안 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기 싫다는 태도는 고 육우당의 죽음을 외면했던 당시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동성애자인권에 적극 관심을 보이는 일부 개신교단에는 소수자 신학 가운데 동성애 신학도 있다고 한다.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사목적 배려를 위해선 사회복지의 탈을 쓴 사회사업과 영리병원으로 대표되는 의료민영화가 아닌, 소수자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실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외면은 곧 하느님을 부정하는 죄이며 성직자의 직무유기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복음해석에 비약이 눈에 거슬리네요.
성소수자의 권리와 합당한 지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잘 알겠지만,
너무 지나친 끼워맞추기식 해석은 오히려
읽는이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점 명심해주세요.
본문에서 어떤 주장을 하고자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많고 논리적 오류를 드러내는 부분들도 많아 보이지만,
다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복음에 대한 해석 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1. "예수는 성적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도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라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예수님께서야 당연히 성적소수자들을 차별하지는 않으셨겠죠.
그런데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가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공관복음에도 예수는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는다. 백인대장이 사랑한 노예이야기에서 나와 있듯, 예수는 동성애 성향의 사람들 말을 적극 받아주는 모습을 보인다. 백인대장이 사랑한 사람이 앓고 있었을 때, 예수는 가서 낫게 해주려고 했다. 백인대장이 갈 필요가 없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하자, 예수는 감탄하며 말로써 그 연인을 병에서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종'을 백인대장의 '동성 연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학문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부분을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쓰시면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것이 맞다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주신 사화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병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백인대장의 신앙이지,
동성애를 인정하고 허락해준 예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아무리 외부기고라지만, 복음 해석만큼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가톨릭프레스는, 정말 '가톨릭'프레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