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편집장(이하, 김)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주도에서 제주 성산교회 박성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제주에서 사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제주 땅이 목사님 개인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박성화 목사(이하, 박)
지금까지 20년 됐습니다. 그동안 교회 울타리 안에서 너무 편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나의 목회 대상이 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되는 구체적인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합니다 .
(김)
제주에 살면서 역사의 예수가 옛날보다 더 가까이 목사님께 다가온 부분이 있습니까?
(박)
제주 4.3사건이라는 역사 현장의 상처속에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과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당혹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나오지 못한 채 땅속에 묻혀 있는 제주공항 활주로를 지날 때마다 저는 인간에 대한 무지와 야만성에 탄식합니다.
그동안 허황되고 왜곡된 정보에 의해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하게 여겨집니다. 이런 제주의 참혹한 역사 현장을 접하면서 그동안 내가 믿고 고백했던 신앙(케리그마) 예수보다, 역사의 예수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고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
제주도를 한반도의 갈릴래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박)
제주도를 감성적 언어로 표현하는 단어로 ‘고립, 고독, 상처, 배신, 이별, 기다림, 배고픔, 가난’ 등이 있고, 일상적 언어로 ‘유배, 공포, 수탈, 폭력, 억압, 집단적 죽음, 행방불명, 연좌제’ 등이 떠오릅니다. 억울한 죽음들로 인해 원한마저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눈물의 현장이지요.
제주도 삼다도라는 말에서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는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죠. 자연환경적 이유도 있지만, 4.3사건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여자들은 생존을 위해 일부종사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죠. 생존을 위해, 불의에 항거하면 꼼짝없이 섬에 갇혀 피의 보복을 당했던 경험은 제주사람을 단순하고 배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4.3사건때 이승만정권은 사방이 바다로 막혀 고립된 제주 섬을 빨갱이 소탕이란 명분 아래 무인도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까? 몽골의 지배 이후 현대까지 역사속에 수많은 상처들이 용천수처럼 흐르고 있는 제주! 갈릴래아가 제주 말고 따로 있겠습니까.
(김)
옛날 4.3, 최근 강정문제까지 이어져 주민들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제주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까?
(박)
아닙니다. 개신교 어떤 기관도 제주도의 현안 문제인 4,3사건과 강정문제를 다루는 곳은 없을 겁니다. 강정 해군기지반대 활동에 대해 개신교는 실제로 비판적입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일부 개신교 성직자들과 신자들과 시민단체가 해군기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투쟁하고 있지만, 개신교 전체의 흐름은 해군기지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4.3 사건도 미군정에서 지원받는 친미기독교 정권인 이승만정권이 가해자로 저지른 일이죠. 아직도 개신교 보수층은 제주도 4.3사건을 좌익 폭동으로 보고,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시각이 여전합니다. 아직 실존 인물들이 살아있고, 이북 출신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교계 지도층으로 아직도 영향력이 있는데, 누가 나서서 하겠습니까?
해군기지를 반대한다 해도 형식적일 겁니다. 태생적 한계죠. 강정해군기지가 미국군사기지가 된다 해도 개신교는 찬성할 것입니다. 양심 있고 진보적인 기장교단과 소수의 개신교 성직자들, 신자들만 오늘도 울분을 삼키며 동분서주하고 있지요.
(김)
현지 주민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개신교가 해야 될 일 아닙니까?
(박)
보수적 입장에 있는 대다수 개신교 교단은 그 문제에 대해 대안이 궁색할겁니다. 대체로 침묵하거나 소극적이거나 회피하거나 형식적인 입장만 보이는 거죠. 4.3사건, 강정 해군기지 문제에 보수적인 정서가 강한 개신교가 과연 이 지역의 치유에 관심이나 능력이 있을까요? 힘든 일이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용기 있고 정의로운 집단은 아닙니다.
(김)
작년 세월호라는 아픈 참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세월호를 보고 대응하는 한국 개신교의 여러 움직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개신교가 세월호 문제에 대해 대응을 잘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아니죠. 대부분 보수적인 개신교의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들의 안위입니다. 교권이던 세속적 기득권이던, 자신들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죠.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신교의 시각은 객관적이고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수구적 이념에 사로잡혀 기득권적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죠.
여의도 반공 극우집회나 교권을 위한 사학법 투쟁이나, 순교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목사들과 신도들이 그랬잖아요. 그러나 세월호 사건 때 어땠나요?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지금도 조용하잖아요.
세월호 사건 진상 규명에 침묵하거나, 오히려 비판적이지 않았나요?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장로회, KNCC 등 진보적인 교회들과 양심 있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김)
‘고통 앞에 중립 없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는데, 세월호 고통 앞에 교회가 중립을 지키면 됩니까?
(박)
교황님의 말씀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고통을 보고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입을 다물라는 것이지요. 강도를 만난 사마리아인을 보고 그냥 가라는 것입니다. 신앙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이지요.
중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핵심 부류가 누구일까요? 그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 주장이 성서적인 발상에서 나온 겁니까? 실제로 자신들의 문제가 되어 보세요. 아마 더 난리를 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의 부패를 보고 중립을 지키며 보고만 계셨나요? 강도의 소굴이라며 상을 엎어 버렸잖아요? 가난한 자들을 보고 침묵하셨나요? 가난한 자들이 기뻐하는 나라가 올 것이라고 외치셨어요.
세속의 수구 이념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탈을 쓰고 교회의 고유한 성역까지 통제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죠. 세월호 참사 자체도 그렇지만 심층에 있는 암적인 부패 구조를 알고도 그냥 덮자는 것이지요.
개신교 주류는 반공, 수구라는 이념의 색안경을 쓰고 있어요. 혹시라도 이 사건을 규명하려다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이 다칠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5공 시절 주일 낮 설교에서 박종철 고문사건에 대해 바른말 했다가 교회가 난장판이 됐어요.
거룩한 강단에서 빨갱이 소리를 한다고 저를 용공으로 찍더라구요. 무섭더군요. 자신들의 심기를 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뿌리 깊은 친미반공주의 이념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개신교의 치료하기 어려운 중병이죠. 지금도 목사들의 설교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김)
한국 개신교가 지난 시절의 성장 단계를 벗어나 최근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압니다.
(박)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든다고 걱정들이 많아요. 교회에 젊은이들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교회가 더 이상 희망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교회는 세상을 이끌 명분과 권위를 상실했어요. 교회는 이미 세상에서 신용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오늘날 1% 가진 자의 기득권에 서서 성공과 번영을 찬양하고, 기복과 이기주의에 뿌리를 두고 성장을 외친 교회의 허상은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는 양극화사회에서 소외되고 이탈한 다수의 사람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요?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의에 시달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현장을 외면했던 교회를 이제는 세상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 있는 신자들과 영리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교회에 속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심각하게 벌어지는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고, 눈을 교회 안으로 고정시키고, 편안하게 지냈던 시절은 끝나고 있는 증거죠.
부패한 자본주의와 공생해왔던 세속적인 교회는 부패한 자본주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불의를 눈감고 자신들의 영위만 추구하는 타락한 성직자들, 교회 세습을 묵인하고 이웃의 고통이 어찌 되든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신자들과 교회는 시대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실 되고 정의로운 신앙으로,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희망을 줍니다. 묵시록에 에베소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신 말씀을 눈여겨야 합니다.
(김)
개신교가 성서와 멀리 떨어졌다고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서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길 수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습니까?
(박)
마을에 전도하러 어느 할머니 댁에 갔는데, “교회도 돈 있어야 사람 대접 받아요” 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극단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돈이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돈이 우선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돈이 없는 하나님? 몇 사람이나 교회에 남을까요? 물량적인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 근거로, 신앙의 척도가 되지요. 진리, 정의, 양심, 진실 등 신앙의 본질적 내용은 문제가 아니지요.
오병이어 설교에서 오병이어 기적만 강조하지 진정 예수님이 군중을 떠난 이유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베드로의 고기 잡는 이야기에서도 기적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 존재와 하나님나라의 소명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그저 기적에만 관심이 있어요.
성서가 물질적 축복의 비결을 가르치는 지침서로 전락해버리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유혹한 빵(돈), 현재 교회는 어느 것에 관심이 더 있을 것 같습니까? 성서의 참된 진리에는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기복적 성공 지향적 설교가 매력 있고 대중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과거에 물량적 교회부흥에 도움이 되어 열변을 토하며 목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입니다. 지금은 양심상 하질 않습니다. 돼지를 많이 키우느니 배고파도 참된 한 마리의 양을 키우는 것이 편합니다.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은 개신교의 상당수 양심 있는 신앙인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김)
'종교에게 돈을 주면 그 종교는 곧 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
맞습니다. 돈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됩니까? 종교뿐이겠습니까? 지금 한국사회에 돈이면 안되는 게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뇌물이 왜 생깁니까? 먹히니까 성행하는 것이죠.
사실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우리사회에 깨끗한 구석이 얼마나 될까요? 부패가 부패로 인식되지 못할 만큼 우리사회는 병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교회 공동체조차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종교는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종교라는 성역과 특권의 울타리 안에 은폐되는 부패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감시자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이지요. 대형교회 세습 문제도 돈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지요. 교회의 싸움 밑바탕에 돈 문제가 원인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김)
만일 예수가 지금 한국에 다시 오신다면, 한국 개신교에 어떤 반성을 요구할 것 같습니까?
(박)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찾아가서 돌보라고 예수님은 먼저 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을 찾아 위로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라고 말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되어 있는 현재 교회를 헐고, 세상으로 흩어져 새로운 세상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김)
가톨릭 신도들이 보기에 개신교 형제자매들이 적어도 성서 공부에 있어 가톨릭을 앞서 있다고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이루어지는 성서공부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성서공부나 이해는 지식이나 감성적 이해가 아니라 깊은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간 삶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참회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저 묵상적이고 지식 차원에서 성서를 공부하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성서는 일반 지식과 달라서 학습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와 달라서 교인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져서 성서의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신앙의 품격을 높여 준다고는 하는데 얼마나 실효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모양은 있으나 내용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쉽게 말하면 성서 지식으로는 인간의 변화에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섣부른 지식이 참다운 신앙인으로 성숙해져 가는데 방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개신교의 성서공부나 제자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또 고통 받는 현장과의 연결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박)
성서교육(제자훈련)은 가난한자와 고통 받는 현장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서는 공동체의 처절한 역사에 대한 고백적 기록입니다. 역사성이 부족한 감성적 지적인 성서교육과 교회 유지를 위한 교리교육은 문제가 되겠지요.
이러한 성서교육은 공동체성, 이웃에 대한 관심, 현장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땅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서 교육은 하늘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니 땅에서 울부짖는 현장의 소리가 귀에 들릴까요? 성서적인 참된 교육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누가 먼저 기뻐할까요? 가난과 불의라는 고통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부유하고 기득권을 가진 신자들은 어떨까요? 애통해 하겠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머리로 하는 성경공부, 교리공부만 가지고는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내 몸처럼 사랑해서 기쁨으로 나누어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서교육은 마땅히 여기까지 와야죠. 불의한 고통의 현장이 외면되는 성서교육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김)
지금 한국 개신교의 약점을 고치고 개혁하기 위해 많은 분이 애쓰고 있습니다. 혹시 성서 공부에 대해서 애쓰고 있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는지요.
(박)
요즘 교회를 바르게 섬기려는 양심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진보 여부를 가릴 것 없이 여기저기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염려하고 개혁을 시도하는 용기 있는 훌륭한 분들도 계시지요.
올바른 성서공부를 통해 교회를 바르게 해야겠다는 성서중심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CBS 성서학당도 그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동안 교회기득권에 갇혀 성서를 바르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용기 있게 교육하는 것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성서의 참된 소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성서학당이 완전한 것은 아니겠지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고 있다고 봅니다. 개신교는 성서를 신앙의 모체로 봅니다. 성서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교회는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김)
작년 방한한 교황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많은 국민들에게 감명을 주기도 했습니다. 혹시 목사님은 교황에게 어떤 좋은 점을 배우셨는지요?
(박)
이국적인 얼굴이지만 굉장히 낯익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동경하던 분을 생전에 보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불의한 세력 앞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 인간을 섬기는 삶의 모습,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용기, 연로하지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종말론적인 그분의 삶의 모습은 고달픈 목회 현장에 있는 나에게 살아있는 큰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고도 양심에 부끄럼 없이 큰소리치는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타락한 목사들과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김)
최근 가톨릭과 개신교가 형제자매 종교로서 서로 대화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교리 대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한국의 어지러운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꾸는데 협조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 대화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앞으로 더 많은 협조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박)
당연합니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환경에 차이는 있지만, 진리 앞에 과감하게 벽을 허무는, 용기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리는 자유롭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진실한 자세가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황님도 그런 대화의 모습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김)
우리 국민의 1/4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통계에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최근 국가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8인중의 네 사람이 개신교 성도이고 두 사람이 천주교 신자입니다.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예수를 따른다는 사실에 한국에 많은 그리스도교 성도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
이 사람들뿐일까요?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기독교에서 윤리가 강조되었고 신앙도 순수했었죠. 그런데 교회가 한국화 과정을 거치고 개발독재를 경험하면서 물질만능의 세속적가치가 절대적인 기독교윤리를 상대화시킨 것 같습니다. 성공만 하면 모든 행위가 다 정당화되는 세상이 되었어요.
말이 기독교인이지 그들 마음속에 예수 정신이 얼마나 있겠나요? 어려움이 닥치면 진실한 믿음으로 해결하기보다 점집에 찾아가자나요. 성완종만 점집에 갔겠어요?
사람은 어려울 때 본질이 나타나죠. 그들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아니죠. 그런 허약한 사람들이 기독교 상층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회의 영성이 깨끗하겠습니까?
세속에서 부유하고 힘이 있으면 실제로 교회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한 게 현실이죠. 교회가 세상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하극상의 사태가 벌어지죠.
최고 권력자가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그 추종세력이 교회 구성원을 이룬다면, 그 교회 목사는 그 권력자 신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그래도 역사와 전통의 권위가 있어서 가끔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한국 개신교는 세속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반공, 친미의 수구이념과 성장제일주의, 번영의 신학화는 외형적으로 성장했지만 교회의 영성은 심각하게 파괴되어 가는 게 현실입니다.
교회가 살길은 성직자들이 가장 먼저 정신 차려야 됩니다. 교황님 같은 용기 있고 양심 있는 성직자들이 많이 나와서 개혁해야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김)
최근 세월호 시행령이 발표되었고, 세월호를 인양한다고 정부가 발표했는데, 앞으로 세월호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한국 개신교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박)
현 정권은 세월호 사건을 최소화하고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양한다고 희생된 사람들이 살아 돌아옵니까? 우리사회가 달라집니까?
문제는 또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하나의 외형적 사건만이 아닌, 원인을 이루는 부패 구조가 문제지요.
그동안 개신교는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보수정권의 부패나 사회의 구조적 부패에 침묵하거나 외면해 왔습니다. 개신교에서 이승만 정권부터 6.25를 거치면서 더욱 친미 반공 이념이 성서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지 기반인 보수정권이 존재하는 한 큰 기대는 어렵다고 봐야죠.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려는 양심 있는 신앙인들의 끊임없는 외침만이 희망적 대응이 되겠지요.
(김)
프란치스코 교황이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에 무슨 인간의 존엄성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심에 끝이 있습니까? 성서는 창세기에서 카인을 통하여 인간의 실체를 고발합니다. 카인은 돈을 독점하기 위해 동생을 죽이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이죠. 독점적이고 야만적인 인간들에게 아무 제한 없이 소유하도록 놓아둔다면, 어떤 현상들이 벌어질까요? 역사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도 인류 역사의 처절한 경험 속에서 나온 결론 아닙니까? 삼권분립도 대통령 임기제도 모두 인간의 실체를 경험하고 만든 제도지요. 그러니 자본주의라도 예외일 수 있나요? 자본을 가진 인간을 어떻게 100% 믿어요?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지요. 그것은 인간 스스로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자연적 질서죠. 자본주의는 돈을 독점하는데 최종 목적이 있는 거 아닙니까? 무한한 자본독점은 반드시 독점 권력을 가져오게 됩니다.
조폭들도 돈이 없으면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죠. 무력의 의한 독재는 우리의 육체를 구속하지만, 자본 독재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구속하는 무서운 권력이 됩니다.
권력도 분산시키듯 자본도 분산시키는 규제가 우리 모두 사는 길이라 봅니다. 교황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김)
‘교회 밖으로 나가라.’ 교황은 그렇게 가톨릭 신도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베이비시터처럼 하지 말고, 상처받고 더럽혀지더라도 교회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기독교 행동 방식의 가장 원론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 자신을 정화하고, 강복을 비는 제단처럼 수동적이며 은둔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찾아오셨듯이, 우리도 찾아가서 어둠과 고통의 현장에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김)
제주도에서 가톨릭의 강우일주교가 제주의 수호신처럼 좋은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개신교에서 박성화 목사님께서 그런 역할을 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히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박)
감사합니다.
박성화 : 제주 성산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전 기장 제주노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