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5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는 원불교 강남교당에서 홍정호 박사(선교학)가 “난민과 환대”라는 제목으로 종교의 평화적 실천에 대해 발제하였고, 참석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하는 홍정호 박사의 발제 전문이다. 요지는 발제문의 맨 끝 문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패를 반복하다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만이 참되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만이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의 평화를 향한 길이다.”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자신의 책 「위험사회」를 요약하며 한 말이다. 부의 분배가 이미 형성된 어떤 위계에 따라 계층화 되는 특징이 있는 반면, 위험의 분배는 스모그처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분산된다. 근대화 과정은 이렇게 산개한 위험을 사회의 하층부에 축적하여 관리하고, 나아가 이윤창출을 위한 시장기회로 삼으려는 합리성의 기획이었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⑵는 벡의 진단은 왜 가난한 지역의 가난한 이들이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은 위험들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답한다. 그들은 나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은 위험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근대사회는 이러한 위험의 불평등한 분배를 합리성의 ‘자연스러운’ 작동방식으로 여기면서 계층 간 적대를 통해 발전해 왔다. 아마 스모그를 한 지역에만 집중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의 실현이 가능했다면 이 사회는 다른 모든 위험을 하층부에 축적한 근대적 합리성의 작동방식을 따라 그렇게 했을 것이다.
위험을 축적 관리하는 근대 사회체계에서 난민은 분쟁지역에서 유입되는 스모그와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누구에게, 언제, 어떤 위험을, 얼마만큼 가져다줄지 모르는 존재, 즉 위험사회의 관리 체계 바깥에 있는 ‘타자’이기에 위험의 축적 관리 방식에 길들여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난민에게 호의적일 수 없다. 특히, 난민에게 덧씌워진 테러와의 연관성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폭력에 관한 한 성찰에서 데리다(J. Derrida)는 테러를 “냉전보다 더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초강대국 사이의 균형 가능성을 전제로 한 냉전과는 달리 테러리즘은 균형을 전제할 수 없는 폭력일뿐더러 그 위협의 원천 역시 “국가가 아닌 계산 불가능한 힘”⑶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incalculability)이야말로 테러가 근대인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이유 일지도 모르겠다. 수치로 환원될 수 없는 위험의 환산불가능성, 하층부에 축적해 관리할 수 없는 위협의 산개성이야말로 위험의 축적 관리라는 적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사회의 외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테러는 위험의 합리적 분배를 통해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예외상태에 놓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합리성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험사회의 작동원리에 균열을 가한다. 테러가 이른바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서방사회에서 다른 모든 종류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극악’의 지위를 부여받는 지점은 바로 여기, 적대를 통한 합리성의 작동방식에 균열을 가해 그 정당성을 질문에 부치는 지점이다.
아르헨티나가 시리아 난민 3천 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오늘 아침 보도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한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시리아, 이라크, 파키스탄 등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도는 난민 수는 약 6천 500만 명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 3천 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아르헨티나의 결정에 대해 반 총장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연 공동 기자회견에서 “아르헨티나의 관대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지도력에 감사드린다”⑷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말부터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 28명은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법무부의 난민 인정 심사를 받지 못해 인천공항에서 콜라와 햄버거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장기간 체류하다 지난달인 7월 4일 입국 조치되었다. 난민지원네트워크의 성명서에 따르면 이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한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한 지 약 8개월 만이며, 심사를 거부당하자 사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소를 제기한 지 약 5개월, 그리고 입국을 허가하고 난민 심사 기회를 부여하라는 취지의 승소 판결이 인천지방법원 두 재판부에서 선고된 지 각 17일, 10일, 세계 난민의 날이 14일 지나서”⑸다.
출입국사무소가 이들의 심사를 거부한 논리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유럽에서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테러의 위협과 시리아 인근 국가들에서의 IS(이슬람국가) 활동의 연계성을 고려할 때 이들 난민들을 국가 안보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건 사법당국으로서의 마땅한 책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테러뿐만 아니라, 난민들의 집단 범죄에 대한 사회적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사례들에 비추어 시리아 난민에 대한 입국 허가가 대규모 난민 입국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심사 거부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도주의적 ‘관용’의 실천 이후 지속되어야 할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심이 당국 관계자들에게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해 볼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국가’를 대변하는 이들의 이러한 고심은 일면 당연한 것이다. 국가는 조건적 환대의 주체일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주체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는 바로 주권 국가라는 관념 자체와 화해할 수 없기 때문”⑹이다. 주권을 지닌 주체의 환대는 그것이 개인이든 국가이든지 간에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를 초대하고 누구를 초대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주체의 자기중심성을 기반으로 한 환대, 즉 “배제하고 폭력을 쓰면서만 행사될 수 있는”⑺ 전통적 환대의 역설적 개념을 구성한다. 무조건적 환대의 어려움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조건적 환대는 당신이 타자, 새로 온 사람, 손님에게 무엇인가 답례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 심지어는 그 또는 그녀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설혹,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당신의 지배력이나 당신의 가정을 빼앗는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조건이다—당신은 당신의 공간, 가정,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한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환대가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극한으로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 만일 내가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방문을, 즉 초대된 손님이 아니라 그 방문자를 환영해야만 한다. 나는 어떠한 타자의 예기치 않은 도래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아야 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나는 모른다. 그러나 만일 순수 환대 또는 순수 선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평이 없는, 기대의 지평이 없는, 즉 그가 누구이든 새로 온 사람에 대한 이러한 열림 속에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끔찍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기 때문에….”⑻
분명한 건 국가나 그 대변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가에게 무조건적 환대를 요청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다.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건 ‘선택적 환대’의 적극적 주체가 되라는 것이다. 국가주의의 폐쇄성을 넘어 인도주의적 가치에 근거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두고 고심하라는 것이다. 관료적 보신주의에 기대어 환대를 실천하는 데 따른 부담을 회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사회의 주체들에게 공론화함으로써 타자성의 수용한계를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용과 인정의 포괄범위를 넓혀가야 할 책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기에 있는 국가와 그 대변자들에게는 있다.
그렇다면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종교는 조건적 환대의 실천을 위한 국가의 충실한 보조자가 되는 일에 만족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조건적 환대라는 (주권의 견지에서 볼 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을 향한 도전과 외침의 주체가 되어야 할까? 사회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무조건적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그가 사람임을 증명할 필요 없이 사람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환대의 토대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태어난 아기를 몰래 죽이거나, 가두어서 키우는 일이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는 건 이렇듯 출생의 사건이 환대의 의례를 대신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무조건적 환대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⑼ 김현경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⑽ 절대적 환대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이미 그러한 무조건적 환대의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他者)는 타자(打者)다. 오 리는 가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더니 십 리를 가자고 하고, 속옷은 줘야겠다고 다짐했더니 겉옷까지 달라며 뒤통수를 후리는 식이다. 나의 환대에 그 어떤 의미나 보람으로도 응답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대면하고 있을 때에만 나는 타자 앞에 있다. 그런데 타자가 그런 존재인 줄 알고서도 기꺼이 맞아들이는 게, 아니 기꺼이 맞아들이려다 실패를 반복하는 게 종교적 환대의 내용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성복 시인이 그랬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가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 문학이라고.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고.⑾ 평화를 향한 종교의 길은 시인의 길과 다른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 예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 그리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건 원래 실패하게 되어 있는 일이 아닌가?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건 사마귀가 제 다리를 들어 커다란 수레를 멈추겠다고 나선 꼴만큼 우습고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참다운 종교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향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에 뛰어들기를 반복하는가?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는 않으려고”⑿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마침내 실패하는 삶에 이르려고, 지면서 이기지 않고 끝끝내 지려고, 몰락을 삶의 양식으로 삼으려고 종교적 삶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이들의 바람과 달리 무조건적 환대는 불가능한 꿈일 테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타자(他者)로 재현된 이에 대한 주체의 관용을 넘어 그의 타자성과 대면하려는 이는 자기의 뒤통수를 후리는 타자(打者)의 민낯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충격을 견디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성을 매개로 한 통치의 지속을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주체의 윤리는 그런 타자를 적대자로 간주해 왔다. 자기중심성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에 속한 개인, 공동체, 국가, 종교 모두 그런 타자를 적대자로 간주하는 사고에 익숙하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당연(當然)의 세계이다. 근대사회의 종교들이 저마다 평화를 말하되, “자기중심적 평화주의”(ego-centric pacifism)⒀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내’가 중요한 세계, ‘나’의 안위, ‘나’의 평화, ‘나’의 보람, ‘나’의 의미가 타자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 아닌가. 나 없이 타자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자기의 문명’에 우리가 속한 때문이다.
평화는 낯선 꿈이다. 너 이전에 존재하는 내가 아니라, 나와 네가 더불어(共) 존재하는(存) ‘우리’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평화는 실현된다.⒁ 무조건적 환대는 마침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꿈이기에 우리 시대 참된 종교들의 정상(頂上)이어야 하지 않을까. 평화세계를 향한 종교의 꿈은 자기 본위적 세계의 충실한 보조자가 되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꿈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그래서 “나는 기꺼이 너의 ‘볼모’가 되겠노라”(E. Levinas)는 다짐을 통해 자아론(egology)으로 구축된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exodus)을 감행하는 공존의 상호주체가 되려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성공한 종교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패를 반복하다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만이 참되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만이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의 평화를 향한 길이다.
⑴ 울리히 벡/홍성태 옮김,『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서울: 새물결, 2006), 77.
⑵ 앞의 책, 75.
⑶ 지오반나 보라도리/손철성 외 옮김,『테러 시대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272.
⑷ 연합뉴스,「반기문 “아르헨티나 시리아 난민 3천명 수용…아픔 나눔에 감사」2016년 8월 9일자.
⑸ 뉴스앤조이,「시리아 난민 신청자 26명 입국-난민지원네트워크 “잃어버린 8개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건가」2016년 7월 6일자. (검색일: 2016년 8월 9일)
⑹ 보라도리,『테러 시대의 철학』, 291.
⑺ 자크 데리다/남수인 옮김,『환대에 대하여』(서울: 동문선, 2004), 90.
⑻ 페넬로페 도이처/변성찬 옮김,『HOW TO READ 데리다』(서울: 웅진씽크빅, 2007), 119-120.
⑼ 김현경,『사람, 장소, 환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5), 211.
⑽ 앞의 책, 242.
⑾ 이성복,『무한화서』(서울: 문학과지성사, 2015), 11, 15.
⑿ 앞의 책, 182.
⒀ 이찬수,『평화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서울: 모시는사람들, 2016), 64.
⒁ 앞의 책, 97.
** 이와 관련한 토론은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토론 참석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상덕(영국 에딘버러대 박사과정, 실천신학)
오현석(중국 북경대 박사과정,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조규훈(싱가포르 난양공대 선임연구원, 종교사회학)
홍정호(연세대 강사, 선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