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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멧동마다 일년에 한번은 머리를 깎는다
  • 전순란
  • 등록 2016-08-29 09: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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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8일 일요일, 비오다 오후 늦게 갬


조용조용 비가 내렸다. 조급한 마음에 줄기찬 빗소리를 기대했는데 소나기가 아니고 땅을 달래며 스며드는, 가을 냄새 물씬 몰고 오는 가랑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공소에 가며 먼 산을 바라보니 지리산도 파란 나무들을 우산처럼 펴고 귀한 비님을 맞는다.


추석이 가까워지며 동네 주변 야산에서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자손들이 찾아와 벌초하는 소리다. 멧동마다 일년에 한번은 머리를 깎는다, 자손이 있는 한. 마을 입구에는 “벌초해 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윗동네 강씨가 벌초를 해주는데 묘 하나에 7만원으로 일년에 300건을 한다니 시골에서도 부지런만 하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다.



어제 밤 뒷동네 산보를 하며 인규씨네를 지나가다 보니 오랜만에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웅성웅성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처음으로 인규씨의 예쁜 두 딸을 보았고, 얼마 전 결혼한 큰사위, 그리고 인규씨 막내동생이 와 있었다. 삼겹살에 맥주를 돌리며 우리 보고도 한 잔 하라지만 둘 다 술하고는 안 친해서 인사만 하고 돌아 나왔다. 사람 기억을 워낙 못하는 보스코가 그 막내동생을 가리키며 “태우 아빠냐?”고 물으니 할머니가 “연세대 간 태영이 아빠!”라고 소개한다.


시골에서 무슨 일로라도 먹고는 살 수 있지만 자식만은 이 가난과 뼈 빠지는 육체노동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다보니 연고대만 가도 마을 어귀에 현수막이 붙는다. 사법고시 합격은 면민과 군민 전부의 경사다. 그렇게 공부하다 고향에 간혹 내려오는 아들은 힘든 부모님의 노동을 외면하고, 부모도 그 귀한 아들에게는 삽자루도 못 들게 한다. “내가 중학교만 나왔어도...”라는 말을 피처럼 토하는 이웃들의 아픔이 나를 늘 부끄럽게 했었다. “내게 값없이 주어졌던 교육의 기회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부지런히 벌초하던 도시 거주민이 사라진 저녁. 밤하늘의 별들과 함께 원주민들은 다시 평온으로 돌아간다. “도시민 없이도 우리는 산다. 무덤 위의 풀이 무슨 대수냐!”



공소 미사에도 많은 귀촌인이 고향으로 벌초를 떠나 식구들이 얼마 안된다. 오늘도 신부님 가족이 마련한 소박한 아침상을 받고 남은 공소식구 전부가 행복했다. 신부님의 세 남매를 생각하면 수녀님이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오래 우리 기억에 남을 게다. 



남해 형부네는 우리 샘에서 ‘지리산물’을 한가득 싣고 바다로 떠나고, 수녀님은 함양교통으로 동서울로 떠났다. 수녀님을 바향하러 나간 김에 나는 함양시장 입구에 일요일에도 배추 모종을 파는 ‘예쁜언니’ 가게에 들러 배추모 60개를 샀다. 가격이 비싼 만큼 ‘똘똘한’ 모종을 데리고 집에 와서 어제 비를 홈뻑 맞은 배추밭에 보스코랑 멀칭을 하고 정성스럽게 옮겨 심었다. 보스코는 여기저기 솟아오른 ‘곰보배추’를 한 자리에 옮겨심었다. ‘귀요미’가 곰보배추의 약효가 좋다고 한 뒤 그니를 위해 정성껏 꽃삽으로 옮겨 심는다. 


석달 후면 저 여린 모종이 통통하고 속이 노오란 배추들이 ‘미스배추 경연대회’에서 쭉쭉빵빵 몸매를 자랑할 게다. 며칠 전 씨앗을 심은 무들도 이틀 비에 일제히 싹을 틔우고 올라온다. 저 무들도 파랗고 하얗고 통통하게 자라 올라 우리 나이든 여자들이 시샘하는 처녀들 종아리처럼 뽐들을 낼 게다.



오늘은 보스코가 여생을 바쳐 번역하고 있는 성아구스티누스의 축일. 초저녁에는 보스코가 5월에 펴낸 「고백록」을 들고서 성인이 자기 모친 성녀 모니카에게 바친 ‘사모곡’(제9권)을 읽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다 타향땅 오스티아에서 숨지면서 남기는 한 마디가 내게도 와 닿는다.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오스티아 성당 벽에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성녀의 묘비명을 나도 읽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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