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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너희 엄마 잘 계시니?’ 엄마가 내게 묻는다”
  • 전순란
  • 등록 2016-09-02 09: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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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수요일 구름 많음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을 젖히면 제일 궁금한 게 구름이다. 산이야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이지만, 하기야 봄이면 연두색 새잎을 이고 여름에는 검푸른 청년이요 가을은 찬란한 오색으로 성장하고 겨울엔 고승처럼 처연하게 헐벗은 모습이다. 다만 옛날 희랍시대의 연극 주인공처럼 한 사람이 가면만 바꿔 쓰고 나타나는 얼굴이다. 그러나 특히 요즘 지리산 하늘의 구름은 그 변화무쌍함에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보스코와 테라스에 앉아 구름을 보며 ‘저건 뭐 같다’, ‘누굴 닮았다’ 하다가 둘이 다 만화 ‘찰리브라운’에서 구름을 보고 라이너스와 찰리브라운이 나누는 대화를 생각하고 우리 둘의 대화가 너무 유치해서 그냥 웃고 만다. 철학 교수인 보스코도 늘 담요를 끌고 다니는 꼬마 철학자 라이너스 만도 못하다. 우리가 그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루시: “구름 예쁘지 않니? 뭉글뭉글 목화송이 같아” “난 하루 종일 여기 누워 구경해도 안 질려” “상상력을 발휘하면 구름은 참 가지가지야. 라이너스 넌 어떻게 봐?”

-라이너스: “응, 저 위의 저 구름은 카리브해 영국령 혼두라스 지도 같고...” “저기 저 구름은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토마스 어킨스 옆얼굴과 조금 비슷해.” “그리고 저건 스테파노가 돌맞아 죽는 장면이야, 한쪽에 사도 바울로가 서 있는 게 보이고...”

-루시: “우와, 멋져. 찰리, 그럼 넌 어때?”

-찰리: “응, 난 새끼오리나 망아지 같다고 하려던 참인데 그만 둘래.”


아침에 문동환 박사님 딸 영미씨가 올린 글을 보고 울컥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엄마가 묻는다. 너희 엄마 잘 계시니?’ ‘??? 음... 네, 아주 잘 계셔요’” 내가 지금 이사로 활동하는 기지촌여성 자활을 위한 ‘두레방’ 사업을 시작한 분이 영미씨 어머니 문혜림 여사다. 내가 한신 다닐 때부터 보아왔기에 너무 잘 아는 분인데... 그 단아하고 미국여자가 동양적이면서도 매사에 적극적이고 명민한 활동가였는데... 세월과 늙음이 가져다주는 저 부산물로 망가져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볼 때 참 절망스럽다. 그래도 이 정도는 ‘예쁜 치매’라는데... 또한 이런 일이 내게 닥친다면 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서울 집을 손보느라 내일 지리산 집을 나흘간 비워야 한다. 그 동안 보스코가 먹을 음식을 해서 그릇마다 담고, 명패를 붙이고, 청소에 빨래에 쓰레기 정리로 하루를 보냈다. “차라리 남편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니는 게 제일 편하겠다” 게다가 금요일에 손님까지 들른다니 쿠키에 애플파이를 구워놓고 대접할 차까지 마련하다 보니 하루가 정신없었다. 


그런 준비만으로도 부족해서 아침에는 보스코를 불러 냉장고 앞에 세우고 블루베리에 요쿠르트를 얹어 먹는 법을 ‘실습’시키고, 점심시간에는 냉장고 속의 록글라스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거기 붙인 명패를 한 번씩 읽게 ‘견학’했더니만, 기껏 하는 소리가  “당신 두어 달 있다 오는 거야?”



바람이 종일 엄청 불었다. 2층 테라스로 어렵사리 기어올라 주렁주렁 달린 수세미들이 묵직하게 흔들리다 보니 줄기 채 아래층으로 떨어져 보스코가 노끈으로 다시 매달아 주어야 했다. 씨를 받아 정자에서 말리던 매발톱, 파씨, 파슬리, 코스모스 등이 다 흩날려 엉망으로 뒤섞여버렸다. 우물가에 놓아둔 밀집모자도 날려 기욱이네 밭으로 월담을 하고... 잘하면 바람에 호미, 괭이까지 날아가겠다. 


산속에 살다보면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는 일이 몸에 익어 가는데 그게 지나치면 은근히 부화가 난다. 하지만 저렇게 사나운 바람도 내일 아침이면 조용하니 돌아앉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엉큼하게 시침을 떼겠지.


오늘이 가면 8월도 끝. 그 뜨거운 날들을 네게 안겨주고 우린 푸른 9월로 간다. 잘 있거라!  어떻든 폭염으로 머리가 익어 있는 새에 한 해의 3분의 2가 이렇게 후딱 가버렸다. 그만큼 ‘남은 날’이 적어지는데...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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