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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한국.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빅 이벤트”가 아니다
  • 편집국
  • 등록 2016-09-15 12:01:01
  • 수정 2016-09-15 12: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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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해 11월, <바티칸 인사이더> Gianni Valente 기자가 1주일간 한국을 방문해 ‘교황 방한 2주기를 맞는 한국교회’를 취재했다. 다음은 9일 <바티칸 인사이더>에 실린 기사(원문보기)의 번역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2주기를 맞아 한국가톨릭교회를 살펴보았다. 이른바 ‘프란치스코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교황 방한을 재평가하려는 교회는 많은 견해들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첫 아메리카대륙 출신 교황이 아시아를 방문한지 막 2년이 지났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방한(2014년 8월 14-18일)에 대한 논평과 해설은 엄청난 열기로 가득 찼다. 일부에서는 ‘프란치스코 효과’의 대박을 점치며, 교황의 임기 동안 아시아가 우선시될 것이며, 이는 한국교회와 아시아 가톨릭공동체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줄 것이라 전망했다.

 

교황 방문 후 불과 2년 지났지만, 유행했던 흥분은 사라지고 한국가톨릭교회의 현재와 미래와 심지어 과거에 대한 좀 더 현실적 평가가 자리 잡고 있다. 바티칸 인사이더가 섭외한 전문 평론가와 사목자들의 평가는 다양했고 간혹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방문이 지역교회의 삶에 ‘기적적 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하였다.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 원장 제병영 가브리엘 예수회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은 한국교회의 심장에 조그만 불씨를 당겼다. 그러나 아직 불길이 활활 타오를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다. 교황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움직이고 열광시켰다. 서울 교외에서 25년 가까이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빈첸초 보르도(Vincenzo Bordo) 신부는 “교황이 도착하기 전부터 기대가 높았다. ‘드디어 교황이 온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드디어 교황이 오시고 열기가 뜨거웠지만, 교황이 떠난 뒤 교회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물론 교황은 그의 자취를 남겼고 누구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교황의 말씀 역시 지금까지 교회 행동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룻밤 새 마법처럼 또는 저절로 무엇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1922-2009)의 정신적 후계자로 여겨지는 강우일 베드로 주교는 겹쳐진 현실에 대해 말했다. 


“우리 교구를 포함한 많은 교구에서 교황 방한 후 성당에 다니겠다고 결심하는 사람과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많은 비신자들이 교황의 단순함에 반했고, 세례 받으려는 예비신자 역시 늘었다. 예년에 비해 50%까지 증가한 교구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 교황 말씀은 교회 삶의 영적 쇄신이 시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이런 신앙 감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교황께서 무슨 말씀을 했는지도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주교단과 만남을 가졌다. (사진출처=바티칸인사이더)


저항과 부적절한 메시지

 

한국교회 내부에서 좀 더 강경한 비평가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만큼 충분히 울려 퍼지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인터넷 가톨릭언론 ‘가톨릭프레스’ 편집장이자 신학자인 김근수 요셉은 “교황은 모든 사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라고 요청했지만, 현재 한국교회에서 이 말씀을  전혀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부자를 위한 종교기관으로 자주 비쳐지고 있다. 교황 발언 중 일부는 이곳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교황이 사제와 주교의 반(反)복음적 태도를 지적하거나 성직자중심주의를 비판할 때 그렇다”고 논평했다. 


남북갈등의 유산인 공산주의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가담하고 있는, 소수지만 점차 확산되고 있는 교회 내 그룹은 세계적인 성장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이은형 티모테오 신부는 “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루면 안 된다. 사회적 의미를 담은 어떤 메시지도 교회가 정치에 개입한다는 표시로 비난 받을 수 있다는 등의 편견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많은 말씀들이 읽혀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사회적 신분 상징인 가톨릭신앙

 

프란치스코 교황의 점잖고 과격하지 않은 방문은 이전부터 한국교회에서 두드러졌던 태도와 생각에 의문을 불러왔다. 예를 들면,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기업에서 빌려온 기준들을 이용하여 가톨릭신자 비율 증가를 ‘프로그램화’하려는 경향 말이다. 또는 중산층의 종교적 신분 상징으로 가톨릭 신자임을 생각하고 체험할 위험이 있다. 그러면 교회가 하느님이 아닌 교회 구조의 효율성을 전적으로 믿으며 강력한 로비 집단처럼 교회를 생각할 위험이 있다. 


특히 개신교 일부에서 대형교회를 건설하려는 강박관념이 가톨릭 교구와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분열시키고 있다. 신학자 김근수는 “새 성당을 짓기 위해, 교회는 부자 신자를 필요로 하고, 가난한 사람은 교회가 불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실상 소외되었다고 느끼거나 경제수준에 의해 평가받는다고 느끼고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지난 12월, 3년 예정의 교구 시노드 일정을 시작한 대전교구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세례를 받으려는 예비자는 모두 중산층이다. 가난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경쟁에 기초한 경제모델을 따르는 선진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 번영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가난을 천벌로 여기고 있다. 

 


잘못된 비교 

 

한국 가톨릭신자 생활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이 미치는 장기적 영향은 1984년과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에 따른 급격한 양적 성장과 대조되어 이미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에 서울대교구에서 세례자 숫자는 세 배가 늘어 91만6천명에 이르렀다. 신중한 분석가들은 신자수의 괄목할 증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덕분으로 자동적으로 여기는 것을 피하고 있다. 


제병영 신부는 “당시 신자 수 증가는 매우 독특한 사회적 정치적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때 군사정권 통치 후 몇 년 동안 민주화와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이 컸던 변혁의 시기였다. 당시 베이비붐 시대였다. 불안정했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매우 큰 시대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민중 곁에 있었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톨릭교회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대했다. 이것이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고 세례를 받도록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이 처한 상황은 그때와 전혀 다르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활기차 있지는 않다. 특히 스캔들과 부패의 대표격이 되어버린 개신교나 불교에 비교했을 때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광범위한 존경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교회조직의 대중적 이미지에서 오는 만족감이 복음 선포를 위한 실제 매력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경제성장은 선진국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주의와 세속화 과정을 동반하고 있다.

 

대형 행사와 일상생활

 


“사람들이 군사정권의 억압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교회는 민중 곁에서 민중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 전에도, 196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에는 굶주림이 있었고 교회는 모든 사람을 도왔다. 그동안 개종자의 수가 증가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신자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계속 번창하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고 빈첸초 보르도는 말했다. 


교황 방문이 한국교회에 경외심과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만한 경향은 있다. 


“한국천주교회 역사를 보면, 선교 초기에 교회는 성직자의 생각이나 계획된 전략이나 큰 행사에 의해 생겨나고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음은 집에 모여 기도하고 복음을 읽던 가톨릭 평신도들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다. 선교사도 사제도 없었다. 평신도들은 일상에서 평범함의 은총을 믿으며 살았다. 박해시대에도 집에 모여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여 신앙을 유지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교황 역시 복음이 우리 일상 속에, 가족과 공동체와 교구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길을 계속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업적이 아닌 하느님의 역사가 지닌 매력을 발산하는 길이다”라고 강우일 주교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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