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제로 살다 보면 사람들의 고백을 많이 듣는다. 죄에 대한 고백만이 아니라 마음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그 가운데 요즘 가장 자주 듣게 되는 감정은 분노나 절망이 아니다. 그보다 더 조용하지만, 훨씬 집요한 감정이다. 바로, 확신이다. 사람들은 이제 정치적 의견을 말하기보다 정치적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언제나 옳고, 누군가는 언제나 틀리다. 그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현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종종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모습을 떠올린다. 신앙이 살아있을 때 사람은 겸손해진다. 그러나 신앙이 이념으로 변할 때 사람은 오히려 확신에 사로잡힌다. 그 확신은 대화를 닫고 질문을 죄로 만들며, 결국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 요즘 정치 문화에서 반복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뉴이재명 현상의 본질
최근 이재명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을 보면 이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어떤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의심의 눈으로만 바라본다. 지지자들에게 그는 언제나 정의의 정치인이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언제나 위험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 ‘뉴이재명’이라는 현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인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어떤 인간의 삶에도 공과 과가 함께 존재한다. 정치인 역시 그렇다. 어떤 정책은 옳을 수 있고 어떤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 그들은 신(神)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역할은 바로 그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팬덤의 구조로 들어가면 이 능력이 사라진다. 팬덤의 세계에서는 좋아하는 대상은 언제나 옳고 싫어하는 대상은 언제나 틀리다. 정치인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응원의 대상이 된다.
김어준에 대한 양가적 감정
최근 유튜브 정치 평론가 김어준을 둘러싼 논쟁도 그런 장면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에게 그는 민주진영의 상징적 스피커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정치적 선동가다. 문제는 이 논쟁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논리를 둘러싼 토론이 아니라 감정적 동일시의 충돌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은 정치권 안에서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최근 민주당 내부에서도 정청래 의원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의 정치적 언어와 행동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개혁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정치적 분열을 키운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논쟁 역시 차분한 평가로 이어지기보다 대개는 진영 내부의 충성 경쟁으로 흐른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현상은 ‘공취모’와 같은 커뮤니티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파장이다. 문제는 이런 공간에서도 토론보다 감정적 확신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논쟁하기보다 자기 생각을 확인해주는 이야기만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자기판단을 의심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이분법적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은 서로 닮아있다. 이분법적 사유는 언제나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바꾸고 토론보다 충성을 요구하며 사실보다 감정을 앞세운다. SNS 시대는 이 구조를 더욱 강화한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연결되는 공간에서는 자기 생각을 의심할 기회가 거의 없다.
결국, 정치적 의견은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 정체성의 표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균형 감각이다. 어떤 정치인의 공을 인정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지지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어떤 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면 곧바로 진영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좋아하는 정치인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싫어하는 정치인의 장점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동양의 고전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태도를 가르쳐 왔다.
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좋아하더라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을 알고 좋아해야 하며
미워하더라도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알고 미워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앙이 아니다.
사제로서 종종 복음서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이 말은 죄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뜻이었다. 민주주의 역시 같은 원리 위에 서 있다. 완벽한 지도자를 찾는 체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의 오류를 견제하며 조금씩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체제다. 그래서 시민에게 필요한 덕목은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지적 겸손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내가 보지 못한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 속에도 일정한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이 겸손이 사라질 때 정치적 확신은 쉽게 독선으로 변한다. 그 순간 정치적 논쟁은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신앙의 경쟁이 된다.
나는 정치가 신앙이 되는 사회를 두려워한다. 신앙이 정치가 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는 인간의 영역이다. 그래서 언제나 불완전하고 언제나 논쟁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의 오류를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충성이 아니다. 더 거친 분노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는 거리감, 조금 더 천천히 판단하는 절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편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다. 정치적 열광은 순간적인 힘을 만든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오래 지탱하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하는 시민성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혹시 내가 틀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토론이 아니라 신앙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때 진실은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된다.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