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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하느님의 어수룩한 사람들
  • 전순란
  • 등록 2016-09-16 11: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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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3일 화요일, 맑음


아침기도를 하는데 밖에서 소리가 난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니 한 사람이 아니다. 산속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우선 반갑고 그 다음에 누군가 궁금해진다. 내다보니 ‘무애아저씨’. 지난번 고친 보일러실 지붕이 새자 어째서 새나 며칠 전 와보더니 오늘은 공사하던 날 도우미로 함께 왔던 ‘구이씨’와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며 홈통의 물이 지붕을 타고 들어가는 자리를 찾아 내 고치고 있다.


보일러실 지붕에서 홈통을 떼내 고쳐서 물길을 돌리고, 두 장정은 덤으로 내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그 속에 빗물에 젖고 녹이 날대로 난 정리대를 꺼내서 감동으로 가져가 한쪽 구석에 설치해주기까지 했다. 그동안 비만 오면 속 끓이던 일을 단번에 해결해줬다.



오늘 일들, 보스코와 나 둘이라면 절대 못했을 테고,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까닭이 이 근방에서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서상에 사는 베로니카 선생이 “집에 뭐 좀 사갈까?”라고 전화하면 “힘 좋은 머슴이나 하나 사다 줘요.”라고 당부할까?


엄엘리사벳이 함양엘 들르겠다며 보잔다. 옮긴 정리대에 물건을 날라다 제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하던 일을 던져 놓고 놀러 나가야 하니까 이럴 땐 노는 것도 ‘일’이다. “그래, 시골 와서 사는 게, 삶을 누리고 쉬엄쉬엄 돌아서 가야 제 맛이지.” 싶어 기꺼이 읍으로 나갔다. 


엘리사벳은 오늘이 전주 교도소에 있는 남편 생일이어서 면회를 하고 동지들과 케이크를 보여주기만 하면서('그림의 떡')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는 (정작 케이크는 간수들 먹으라 내주고) 왔단다. 3년간을 그렇게 생이별로 보냈으니 어찌 보면 슬프고 안타까운 여인이지만 앞으로 2주면 남편이 만기출소 하기에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악수하던 두 손만은 얼음장처럼 차더라 며 보스코가 걱정이다.


▲ 방안으로 날아들어온 고추잠자리의 사랑 ⓒ전순란



이 땅의 가난하고 불쌍한 민중을 편들다 저렇게 된 사람들은 속 끓이는 나날들을 감옥에서 보낸다 해도 그곳을 '국립호텔' 쯤으로로 여기고 버티면서 지내더라도 ‘내가 사는 사회가 민주화만 된다면’ 충분한 보상이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나와서도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게 없을 뿐더러 '세월호', '종군위안보', '사드'로 더욱 암담해진 내 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먼 옛날에도 그렇게 고심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7-9) 사회정의를 외치다 비운에 간,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다.





항일운동 하다 만주벌판에서 박정희 토벌군에 학살당한 사람들도, 저 지리산 능선과 골자기에서 대한민국 국군 손에 피살당한 사람들도, 3.15, 4.19, 5.18 일자에 대한민국 군경 손에 죽임당한 저 모든 사람이 ‘주님의 꾐에 넘어간 어수룩한 사람들’ 아니던가? 우리야 웬만큼 영악하니까 태평하게 잘도 살아남지만...


샤브향에서 엘리사벳이 대접하는 점심을 먹고, ‘꽃무릇’이 만발한 상림을 함께 걸었다. 꽃과 강물과 논병아리와 연밭, 연밭 바닥의 무수한 우령이와 가시돋은 연잎 줄기에 그 여린 살로 기어올라가 빨강고 소복하게 낳아 놓은 우렁이알도 보았다. 


후식으로 ‘콩꼬물’에서 눈꽃빙수와 커피를 하고 엘리사벳 일행은 서울로 향하고 우리는 휴천재로 돌아왔다. 단풍이 찬란히 산정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 남편과 함께 휴천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 상림숲 연리목 새에서



텃밭에 무와 배추는 그런대로 크기는 컸는데 벌레가 마치 무잎을 모기망처럼 말갛게 먹어가는 중이다. 옆집 제동댁이 소독통을 매고 약치는 걸 보니 그 집 무밭도 벌레가 많은가 보다. 나도 때로는 “약을 확 쳐버려?”하는 유혹을 느끼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황토유황, 은행껍질효소, 목초액을 물에 섞어 이틀에 한번씩 주기로 했다. 목초액을 조루로 무밭에 뿌리는 어둑한 시각, 중천에는 어둠이 짙을수록 선명해지기만 하는 보름달이 한가위로 걸음을 서두르는 중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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