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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지금 보니 내가 아픈 게 제일 수월하더라!”
  • 전순란
  • 등록 2016-09-21 10:16:37
  • 수정 2016-09-21 10: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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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0일 화요일, 맑음


오랜만에 태양을 본다. 북구 사람들이 얼마나 해가 고팠으면 해 뜨는 날은 남녀노소 모두가 공원이고 강변이고 가리지 않고 벌거벗고 태양을 맞이하던 그 기분을 알만하다. 지진과 가을 장마로 추석 열흘을 지나고 오랜만에 본 저 태양이 아깝지만 함양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수영복 차림으로 선팅을 하기는 그래서 뭐라도 말려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고추랑 대추, 그리고 빨래와 돗자리를 말리려 테라스에 자리를 폈다.


그런데 고추를 자기네 건조기에서 말려준 인규씨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미루가 준 고추가 대부분 히나리져 골라서 버리려니 참 아깝다. 해 좋을 때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비오기 시작할 때에야 땄다니 할 말은 없다. 점심 먹고 고추 빻으러 간다던 미루가 말린 고추를 꼭지도 안 따고 방앗간에 들고 갔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말에 40여 년 전 내 생각이 나서 한참을 웃었다(“따는 거나 빻는 거나 고추농사 짓겠다, ㅋㅋ!”하면서).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결혼 첫해 소금 양을 몰라 스무 폭 김치에 소금 20kg을 써서 소태를 만들었던 새댁....



어제 밝은 대낮에 효소약을 쳤기에 벌레가 사라졌나 열무 속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그물망을 둘러놓고 고갱이에 머리를 처박고 열심히들 먹고 있다. 배추는 빗속에까지 우산을 쓰고 벌레를 잡았는데 무는 며칠 소홀했더니만 무밭이 꼴이 아니다. 드물댁이 산에 가다가 우리 밭을 들여다보고 “첨엔 동네에서 젤루 좋드니만 완전 조져 부렀구먼. 그러니까 첨에 나라도 흰가루 (DDT)를 쥔 몰래 확 뿌려 버렸어야 했는데... 죽은 아들 뭐 만지듯 그만 쪼물락 거리고 기왕 먹던 거 벌레가 마저 먹게 놔두고 상림 꽃구경이나 대녀오쇼”란다.


보스코가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는 듯 유리컵을 들여다보고 있다. 열흘 전에 상림에서 꺾어온, 우렁이 알이 곱게 붙어 있는 연잎 대궁에서 알들이 부화하여 물컵과 책상 바닥에 하얗게 떨어져 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니 깨알보다 작은 게 우렁이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었다. 그 작은 몸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들 한다. 저 나이에도 저런 자연현상을 저렇게나 신기하게 들여다보는 호기심 때문에도 보스코가 나이보다 덜 늙어 보이나보다. 


“산동 데레사가 요즘은 어떤가?” 궁금해 전화를 하니 여름 내 주변 사람들이 아파 문병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단다. “예전엔 내가 성하면 남을 돌보는 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아픈 게 제일 수월하더라”고 한다. 농촌에 내려와 몸 건강해야지, 아니면 대책이 없다. 늙은이의 삶 전부가 건강에 달리긴 하지만...



오늘은 서울집 마루 바닥을 뜯어내고 내일은 새로 바닥을 깐다고 했는데 마루를 뜯다 그만 난방 파이프가 다섯 곳이나 파손됐단다. 그걸 다시 연결하고 시멘트를 발라 말리자면 금요일이나 바닥 일이 끝난단다. 속이 탄 곽서방, 처갓집 일이라서 자꾸 연락은 해야 하는데 우리 조카 미선이가 ‘돈세탁’ 아닌, 바지에 들어있던 ‘핸드폰세탁’을 했단다. 3주 정도 공장에 가 있으면 고쳐질지도 모른다지만, 영업하는 사람이 전화기에 입력한 모든 데이터를 날렸으니 얼마나 기막힐까? 고모님, 이쁘기만 한 색시가 쪼끔 미워질라 하더라구요 그 말이 얼마나 귀엽던지 “우리 미선이 정말 시집 잘 갔구나!” 감탄을 했다.


이사야는 산에 가고, 화계까지 와서 뜸을 뜬다는 미루가 점심에 혼자라는 얘기를 듣고 휴천재로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별반 먹을 것도 없는 밥상도 맛나게 먹는 그녀가 함께 하면 그게 모두에게 반찬이 된다. 그제 보고 오늘 보는데도 ‘귀요미’만 보면 보스코의 입이 귀에 걸린다.



보스코나 나나 할 일이 많을 게라고 그니가 부지런히 떠나고 보스코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 하느라, 나는 내일 느티나무 독서회 책읽기 몫인 「앵무새 죽이기」와 씨름하느라 오후를 다 보냈다. 500페이지 넘는 책을 오늘사 읽고 있으니 숙제가 끝나려면 오늘밤은 꼬박 새워야겠다. 그래도 이 나이에 아우들과 어울리며 밤새워 책을 본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늘 딴 책을 읽느라 이처럼 늦고생인데 내 어렸을 적부터의 세 살 버릇이어서 틀림없이 여든까지 갈 게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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