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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한 사회에서 '지식인' 아닌 '지성인'으로 산다는 것
  • 전순란
  • 등록 2016-09-23 10:49:43
  • 수정 2016-09-23 1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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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1일 수요일, 흐림


보스코가 2시부터 실상사에서 지리산댐을 두고 관계당국과 간담회를 두고 12시에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지리산생명연대’ 회합을 먼저 갖는단다. 점심을 겸하는 모임이란다. 그를 실상사에 데려다 주고는 나는 ‘운봉도서관’이라고 불리는, 윤희씨네 별장에 가다가 그 길로 그니와 함께 구례에 있는 ‘자연드림파크’엘 갔다. 오늘은 불량 식품을 먹기로 작정하고 윤희씨는 돈까스를 먹고 나는 고르곤졸라피자를 먹었다. 그니는 산채비빔밥을 먹자는데 지난 추석부터 내내 나물만 먹은 기분이어서 오늘까지도 나물을 먹으면 내 목구멍에서 ‘음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점심후 ‘구만리’저수지에서 산보를 했다. 멀리 지리산 자락이 보이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멋진 다리를 건너면서 친구랑 함께 걷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또 집만 나서면 30분 이내에 전혀 다를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게 지리산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멋이다. 공공근로를 나온 사람들이 키만큼 자란 풀을 베면서 한창 꽃을 피워 올리는 꽃무릇까지 모조리 베어버려 안타까웠다. 한 해를 내내 기다려 키워 올린 꽃대는 봄철의 푸르른 잎과 가을의 붉은 꽃이 영영 만날 수 없는 서러움에다 마악 피워낸 꽃송이마저 예치기로 잘리는 서러움이 더해지는 광경이다.


바로 이웃이 산동이어서 ‘산동 데레사’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예고도 없는 방문이 당황케 할 것 같아서 윤희씨 별장으로 돌아갔다. 그 집 도서관에서 「앵무새 죽이기」 끝대목을 마저 읽고 4시 30분에 함양읍으로 갔다. 윤희씨는 얼마 안 남은 토종옥수수를 한 아름 따서 안겨준다. 우리 텃밭 옥수수도 워낙 여름이 가물어 손가락만큼 자라다 말았는데 그 집 옥수수도 마찬가지였다.





6월에 오신부님이 선물해 주신 컴퓨터가 얼마전부터 부팅이 잘 안되더니 오늘은 아예 멈춰서고 말았다. ‘선수넷’ 아저씨는 비밀번호부터 열리지 않고 윈도우가 완전히 갔다는 진단. 역시 보스코의 ‘기계 망치는 은사(恩賜)’는 탁월하다. 무슨 기계든 망가뜨리고 싶다면 보스코에게 갖다주면 된다. 그의 손에 오면 자칫 자주 잘도 고장나고 망가진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의 큰아들은 정반대로 ‘기계치유의 은사’를 받아 제네바 교민들이 고장난 기계를 집으로들 들고 온단다. 보스코 친구 중에도 아우구스티노라는 분은 가는 곳마다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는 기술이 있어 어디서나 환영을 받는다는데, 보스코는 만지는 기계마다 고장내는 기술이 있어 A/S 센터로부터 “자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장이라도 받아야겠다.


저녁 6시 함양 도서관. 추석 뒤끝이어선지 느티나무독서회 회원들이 많이 못 왔지만 여섯 명이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두고 감탄들을 자아냈다. 아이의 눈으로 보는 어른들의 세계, 아버지로서 아이들 앞에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얘기를 해야만 하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윤희씨는 두 딸에게 한 권씩 선물해 주어 결혼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는 엄마가 될지 가르치고 싶단다.




미국 남부지방에서 흑인을 위한 국선변호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시작하고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용기’라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 모두가 손가락질 해도 이 담에 내 아이들 앞에서 당당해지기 위하여, 다수가 수긍하는 일보다도 내 양심이 수긍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지성인(知性人)’이라는 긍지를 가르치는 소설이다.


보스코가 오늘 실상사에 가서 무조건 4대강을 막고 골짜기 있는 데마다 무조건 댐을 세우려는 관료들과 인내심을 다하여 '대담'을 갖고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성인으로서의 양심' 때문이리라. 전국민이 대학을 나오다시피한 지식인들이지만 사회와 역사를 책임지는 지성인은 극소수인 우리 사회를 가슴 아파하는 그로서는 산골에 와서도 이리저리 환경운동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



▲ 실상사 극락전의 철불상 눈은 천왕봉을 넘어서 일본을 노려보는 시선이라는 설이 있다 ⓒ전순란


집에 돌아오자마자 윤희씨가 준 옥수를 삶아 보스코랑 한 솥을 거의 다 먹었다. 친정아버지 고향이 이북 평강이어선지 나는 ‘옥시구’를 참 좋아한다. 물알이 겨우든 옥수수, 손가락들만한 토종 옥수수,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파질만큼 잘고도 부드러운 옥수수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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