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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백남기(임마누엘) 농민의 빈소에서
  • 전순란
  • 등록 2016-09-28 09:54:55
  • 수정 2016-09-28 09: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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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월요일, 맑음


나물먹기가 저렇게 싫을까? 마치 육식동물이 채식을 하는, 말하자면 ‘개가 풀 뜯어 먹는’ 경우에 딱 저런 표정일까? 비빔밥에 고추장을 넣어서 비빈다기보다는 고추장에 밥을 말아먹는다는 표현에 맞게 맵고 짜게 먹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바꾸기 힘든 그의 식습관이다. “여보, 짜게 먹으면 건강에 나쁘고 온갖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고요” 해봐야 입만 아프고, 저렇게라도 맛있게 먹으면 그게 건강이려니... 내가 좋아한다니까 마지못해 따라와 오늘 꽁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는 보스코의 표정을 얘기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고기를 즐겨 먹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청소를 하였다. 마루 까는 공사가 남겨 놓은 나뭇가루 먼지가 온 집안과 가재도구와 벽면에 남아 있어 마루 걸레질만도 몇 번이나 해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스코. “처녀 하나를 데려다 놓으면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일을 하고, 하루 세 끼만 먹여주면 불평불만 없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살림하고, 애 낳고 애 키우고 애 가르치고... 전혀 지켜질 가능이 없는, ‘사랑한다’라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거는 여자란 참....”


30년 가까이 단감을 먹여주다 세 해 전 얼어죽은 감나무에 새로 가지가 돋고 딱 한 개가 열려 단감나무의 희망을 도살리는 중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세계를 너무도 모르기에, 서로 탐구하면서 아직도 알 듯한 무엇이 남아 있는 한, 잘도 살아가는 듯하다. 남자 역시 ‘사랑’이라는 콩깍지로 한 여자에게 묶이면, 목줄 채워진 푸들강아지마냥 일평생 한 여자에게 묶여 다니면서 먹이를 물고 와서 꼬리를 치는 모습으로 여자들 눈에 비치는 듯한데...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창조주 말씀은 남자에게 해당하지만 남녀간의 그 절절한 끌림은 창조주의 오묘한 신비다.



7시에 광화문 미사에 갔다. 오늘은 인천교구가 미사를 주관하는 날, 김영욱 신부님의 강론이 설득력 있고 과감하였다. 어제 돌아가신 농민회원 백남기씨에 대한 애절한 사연과 현 정권의 비정함에 대한 분노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론이었다. 10일 전 교황님이 신임주교 연수회에서, 주교는 수완 있는 행정가가 아니고 자비를 베푸는 목자라고, 부디 양떼의 냄새가 몸에서 풍기는 목자가 되라고,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길, 강도 맞은 사람들이 즐비한 길은 주교관에서도 아주 가깝다고 하셨다는 가르침도 인용하였는데 이런 시국에서 그런 말씀을 알아듣는 성직자가 몇이나 될까 스스로 부끄럽다는 얘기도 했다.


미사 후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가서 백남기씨의 빈소에 들렀다. 문상객들이 줄이어 찾아와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고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데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국민이 사안의 시비를 알고 있고 젊은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징조였다.



조문객들이 문상하는 동안 우리는 기나긴 ‘연도(燃禱)’를 드렸다. 산 사람들이 죽은 이에게 할 만한 일이 없을 때에 죽은 이가 주님의 자비를 입기를 비는, 한국천주교의 구성진 가락과 기도문은, 유가족 아닌 고인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이다. 고인은 민주화와 농민의 생존권을 위해 평생을 투쟁하다 이제 목숨마저 바쳤으니, 순교자답게 신앙을 실천한 평신도다. 


함께 연도를 바치던 할머니 한 분은 보스코를 반기며 그의 이름을 더듬더듬 기억해냈고, 수년전 시청 앞에서 행한 보스코의 ‘살모사’ 발언을 상기하면서 그를 반가워하였다. 이토록 남녀노소 이 나라의 정세와 운명을 염려하는 국민이 많다니 우리 사회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표시다.




애오라지 기득권의 충견노릇을 일관하는 검찰의 시체탈취를 막으려고 수백명 젊은이들이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다. 모든 진료기록은 검찰이 이미 탈취해갔다는 소문도 들린다.


문상과 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국염 목사가 도착하였다. 그곳의 문상이 끝나자 한목사가 다른 부고를 내게 전했다. ‘이주여성인권센터’ 이숭리 이사의 친정어머니 부고였다. 그 길로 우리 둘은 강남 성모병원으로 향하고 보스코는 집으로 돌아갔다. 98세에 자연사하신 친정어머니의 상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넘었다. 하루를 정말 길게 살았다는 느낌 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서 일기장을 들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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