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6일 목요일, 맑음
서울 살면서 날마다 눈 뜨면 북한산 백운대를 올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우리가 40년간 누린 행운이다. 태풍이 물러가면서 미세먼지까지 날렸는지 모처럼 선명한 하늘, 새파아란 가을 하늘이다.
오랜만에 서울집에 오면, 떠날 때 마지막에 하는 그대로, 대청소를 한다. 위아래층을 쓸고 닦고 있노라면 “왜 깨끗한데 청소를 하느냐?”는 남편의 핀잔인데, 보스코도 빵기도 심지어 집사 엽이도, 그러니까 도대체 남자들은 더럽고 깨끗하고를 인지하는 지각능력이 없는 듯하다.
9시도 되기 전에 보스코는 빵기 데리러 공항에 빨리 가자고 재촉이다. “여보, 공항까지는 불과 70여km. 출근정체도 없는 시간대니 한 시간이면 충분해요. 정확히 말해서 10시 15분에 떠나서 늦어야 11시 30분에 도착! 11시에 도착하는 비행기에서 짐 찾아 나올 거에요” 이렇게 정확하고 또박또박 설명을 하고 있노라면 그는 경탄어린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참, 말 하나 청산유수네”하고는 다시 자판기로 눈길을 돌린다(역시 남자를 압도하는 건 여자의 언어!).
그런데 저렇게 자판기에 눈을 돌리고 책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남녀가 바뀌어 아내가 “여보, 늦겠어요” 하고 남편이 “잠깐, 여기까지만” 하는 대화로 출발을 서두르는 일이 내 몫으로 돌아온다. 보통은 나 혼자서 공항에 나가지만 오늘은 자기도 아들보러 나가겠단다. 늙어가는 징조다.
여하튼 10시 15분에 우이동을 출발해서 의정부로 돌아가는 100번 고속도로에 오르니 도봉산의 위용에 뒤이어 북한산 뒷모습이 보인다. 우이동에서 북한산의 위풍당당한 앞 얼굴만 보다가 송추나 일산에서 바라다보는 북한산 뒷모습을 보면 훨씬 초라해 보인다. 저 산의 두 얼굴은 우리 어렸을 적에 늘 호통을 치고 무서운 얼굴을 하시다 몇 해 앞 당겨 정년퇴직을 하시고 파자마바람으로 늙어가시던 친정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공항에 도착하니 정확히 11시 27분! 차를 주차하고 ‘도착’ 터미널로 들어서니 정확히 11시 30분! 아들은 짐 카터를 밀고 걸어오는 중이다! 편서풍 덕분에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가 5분 앞당겨 도착했다는 전광판이 떠 있다.
아들은 언제 얼싸안아도 늘 짜릿하다. 도착하는 오늘 정도는 우리와 함께 지낼 줄 알았는데 입국 즉시 회의장에 나오라는 회사의 지시가 떨어졌다면서 짐 가방만 우리에게 맡기고 공항에서 지하철로 출근하겠단다.
점심시간이라 밥이나 먹자니까 짜장면을 먹겠단다. 걔도 일시 귀국하면 먹고 싶은 식단 중에 짜장면이 있는데 첫날 그걸 먹고나면 리스트에서 할 일 하나를 지울 게다. 요새 어린애들에게는 햄버거나 피자겠지만 우리 어렸을 적 선호하는 ‘외식 1호’는 중국집 짜장면이었던 전통이 아들 대까지는 내려갔다.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러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두 늙은이가 흐뭇한 눈으로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아들은 앞만 보고 간다. 그렇다, 자녀는 앞만 보고 멀어져 가고 부모는 뒷모습만 지켜보는 것이 인생이다.
빵기를 출근시키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들이 갖고 온 크고 무거운 가방들을 들여놓고 우리 둘은 정원손질에 나섰다. 마루를 석자 내어단 앞마당에 흙을 돋우고 퇴비를 섞어 겨울에도 버티는 패랭이를 심었다. 주위에는 돌을 박아서 울타리를 하고 오늘 사온 국화 두 그루도 땅에 묻어 집에 오는 손님들을 반기게 하였다.
나는 꽃집을 보면 (참새 방앗간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의 정원작업에 조수를 한 보스코는 좀 무리를 했는지 부정맥이 다시 나타나 맥을 못 춘다. 그러면 나머지 몫은 다 내 것! 어제 아침에도 너무 무거운 걸 들다 내 어깨가 갈려 명인당에서 침까지 맞고 올라왔는데 내 집 마당에서 괭이질 호미질을 저녁 늦게까지 하다보니까 어깨 통증이 싹~ 가셨다. 역시 나한테는 노동이 보약이다.
저녁 늦게 퇴근한 빵기가 칫솔을 달라기에 새것을 내주었더니만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엄마, 이런 칫솔 몇 개 제네바에 가져 갈게요. 시아한테 그곳 어른 칫솔은 머리가 너무 크고 또 어린이 것은 너무 작아서 탐탁치 않아 해요”란다. 우리가 걔를 바라보듯, 걔도 매사에서 자기 아들을 바라보는구나, 하였다. 둘이서 한참이나 이런저런 얘기로 자정을 넘기고 나니까 “엄마, 일기 안 쓰세요?” 란다. 아내와 두 아들한테 도착소식을 전할 시각인가 보다. 10시 기차를 타고 이미 꿈나라로 떠난 보스코가 있는 이층으로 올라와서 일기장을 손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