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 참석 중인 주교들이 11일 오후 8시 백남기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빈소를 찾은 주교들은 먼저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의인의 죽음을 추모했다.
이날 빈소를 찾은 4명의 주교는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장)와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 민족화해위원장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 광주대교구 옥현진 보좌주교다. 추모 미사는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으며, 100여 명의 신자가 함께했다.
백남기 선생이 선종한 날 곧장 빈소를 찾았던 김희중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살아생전 국가 민주화와 농촌 살리기에 헌신했던 백남기 선생이 우리 가운데 부활할 수 있게 되길 기도했다. 또한, 현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유가족이 거부하는 부검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정비해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주교는 가족을 떠나보내면서도 슬픔보다는 분노로 그 아픔을 채우고 있을 백남기 선생 가족들을 안타까워하며, 정직하게 땀 흘려 길러낸 농산물을 정당하게 대우해 달라는 외침이 죽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것이었냐고 분노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지금 이 자리는 백남기 형제가 누워있을 자리가 아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며 생명의 신비스러움에 경탄하고 즐거워해야 할 들녘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꼴인가”라며 “임마누엘 형제를 떠나보낸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이래도 되는가”라고 분노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검찰이 부검 영장 집행으로 시신을 탈취할 경우에 대비해 냉기가 도는 추운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의인의 곁을 지키는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또한, 3백일이 넘도록 백남기 선생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미사를 봉헌한 신앙인들, 장례식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시민들과 농민회 등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이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길 바란다”라며 “국민을 이토록 비상상태로 살게 하는 일은 나쁜 일이다. 이들의 분노가 하늘에 닿기 전에 책임자들은 하루라도 서둘러 (이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백남기 선생 사건에 대한 종교인으로서의 고백도 있었다. 김희중 대주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오가는 꼴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찌하다 이런 참담한 꼴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됐는가”라며 “상갓집을 만나면 밤새 함께 울어 준다는 우리 민족이 어쩌다 이리도 척박하게 됐는지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없이 자괴감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이어 “백남기 형제의 육체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의 정신은 우리 가운데 살아있을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남북의 화해와 평화, 우리나라의 민주화, 농촌을 살리고 있는 우리 농민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백남기 선생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사태해결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서울대병원 측이 백남기 선생의 사망원인을 ‘병사’라고 진단하고, 검찰이 이를 근거로 사망원인을 규명하자며 부검을 고집해, 사망한 지 17일이 지나도록 백남기 선생의 장례식은 치러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백남기 선생의 안식을 바라는 추모 미사는 장례미사가 아니라 매일 미사로 봉헌되고 있으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실에서 매일 오후 4시에 봉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