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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아들이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 전순란
  • 등록 2016-10-21 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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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맑음



빵기는 새벽에 일어나 냉장 냉동 식품을 포장하는 것으로 오늘 가방 싸는 일을 마무리했다. 71kg이나 되는 짐을 가방 넷에 나누어 넣고서는 할일을 다한 기분인지 “아~ 가기만 하면 된다”라는 신음이 절로 나오나 보다.


며느리와 같이 한국에 나와도 짐은 빵기가 싼다. 자기는 짐을 너무 많이 싸봐서 그 누구도 흉내를 못 낸다니 잘하는 일은 잘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시켜야 한다. (보스코는 그 많은 이사와 출입국에도 단 한 번 이삿짐이나 여행가방을 싸 본 적이 없다!) 아들과 짐을 수락산 공항버스터미널에 실어다 주었더니 5분 후에 리무진 직행버스가 왔다. 그리고 공항에는 50분만에 도착했으며 탑승수속과 짐부치기면 하면 된다는 전화. 



“빵기가 가족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입밖에 내려다 보니, 걔의 가족은 제네바에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보스코는 걔한테 가족 아니고 뭘까? 엄마 아빠?! 가족을 만들려고 자기가 떨어져 나온 본 뿌리? 감자에서 눈을 하나씩 도려내 땅에 심으면 거기서 싹이 나고 감자가 조랑조랑 들고 한 포기의 튼실한 감자 식구로 자란다. 도려냈던 원 감자는 흔적도 없고, 감자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건 새로운 감자 속에 자취없이 스러져 버리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되는 운명을 서러워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엄마 아빠 감자는 새싹을 위해 기꺼이 자기 살을 자라나는 밑거름으로 주고서 기꺼이 사라질 뿐이지 않는가?


사부인께 보내주신 과자 고맙다는 전화를 드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보내 드리고 주신 것만 받아먹으려니 염치가 없네요”라니까 “이제 우리 사이도 십년이 넘었으니 좀 편해져도 되지요. 줄 수 있는 사람이 주고 먹을 사람이 먹으면 됩니다”라신다. 어제 당신이 대구를 가려고 KTX 차표를 예약했는데 그 시간에 차도 자리도 없더란다. 차표를 보니 서울발이 아니라 동대구발로 발급받았더라며 실상 요긴한 일조차 이렇게 정신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탄식하셨단다. 


나 역시 얼마 전 생선을 사오던 봉지에 내 핸드폰을 넣은 채 냉동실에 넣고선 한참이나 핸드폰 찾던 이야기를 드리며 서로 웃었다. 아무튼 “우리 며느리 착하게 낳아서, 반듯하게 키워서, 저희 집에 시집보내주셨으니 늘 큰절이라도 드리고 푼 심정입니다”라는 인사와 “최소한 잔소리나 바가지는 안 긁는 아이에요”라는 응답이 오갔다.


빵기가 이번에 가면 곧이어 아프리카엘 갔다가, 스리랑카에 와야 하고, 뒤이어 로마 국제식량기구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데... 사내아이 둘이어서 그만하지, 할머니 욕심대로 손녀 하나만 더 낳으려다 아들이라도 하나 더 나오면, 자기는 출장이고 출근이고 끝장이라는 빵기의 말. 엽이 친구가 얼마 전 결혼을 했는데, 게임 출시를 앞두고 자주 밤을 새고 새벽에 들어가면 아내가 울고 있단다. 새색시 달래느라 한 시간씩 애를 먹더라는 얘길 듣고서, 집에 있는 시간 보다 해외 출장이 많은 남편을 두고서도 말 없이 두 사내애를 건사하는 우리 며느리, 그 넉넉한 마음씨가 고마울 따름이다.



평소에 임보 시인의 시집을 즐겨 읽는다. 늘 손 가까이 두고 하루에 한 두 꼭지를 읽는데 2002년 7월에 나온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라는 시집 맨 첫머리에 “우리들의 새 대통령”이라는 시가 나온다. (바로가기)


박근혜가 망쳐놓은 요즘 나라꼴을 보면 그 시의 끝대목이 너무 절절하다.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아, 동강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새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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