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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우리는 해냈다!” “우리는 해내리라!”
  • 전순란
  • 등록 2016-11-16 10:40:00
  • 수정 2016-11-16 10: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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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맑음


그 동안 잊고 지낸 세월에 서울집 언덕 위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가 화려한 축제의상으로 갈아입고 가을이라는 계절의 마지막 날들을 배웅하고 있다. 자연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저렇게 예쁘게 의상을 갈아입고, 강산은 절기마다 ‘인테리어를 바꿔가면서’ 변함없이 아름답기만 한데... 속된 인간군상은 세도를 부리면서 떨어진 낙엽조차 진흙탕 속으로 묻혀 더럽게 만든단 말이다.



어제 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길. 광화문 전철역으로 내려갔더니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가는데 개찰구를 지나는데도 한 시간은 넘을 듯해서 ‘해치광장’으로 다시 나와 안국동 전철역까지 걸었다. 3호선도, 4호선도 오래 기다려 타는 사람들로 한없이 붐볐지만 모든 이의 얼굴에는 축제를 지내고 오는 자부심과 더불어 의문에 찬 절망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냈다” “우리는 해내리라” “그러나 기득권이 순순히 물러갈까, 우리가 피를 흘리기 전에?”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약초원 사잇길로 만월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고단한 얼굴로 우리 발걸음을 비추어 준다. “아아아, 고단한 서울의 달!”(정태춘)



걷고 또 걷고, 사람들에게 밀리고 또 밀리고, 목청껏 외치고 또 외치고... 얼마나 피곤했던지 오늘 아침까지 그냥 쓰러져 잤다. 지난 7년여 세월, 처음으로 일기를 새벽에 일어나서 써야 했다. 보스코도 종일 몸을 추스르지 못하여 일어나서 책상에 앉았다 소파에 누웠다를 반복한다. 정신 나간 여자 하나를 뽑았다가 온 국민이 몸살 중이다. 그 어미나 아비처럼 떠밀리지 않으면 떠나가지 않을 딸이다. 


엽이가 어제는 ‘여친집’에 인사를 갔다 왔고 오늘은 그 여친을 우리에게 인사시킨다고 데려왔다. 엽이 엄마 정옥씨가 사돈어른 될 분들에게 인사가는 아들더러, 가거든 큰절을 하라고 (그대신 두 번은 하지 말라고, 두 번 절은 돌아가신 분에게만 하는 것이라고) 타일렀다는데 오늘 찾아온 한 쌍에게 혹시 나한테 두 번 절할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웃는다.



그 색시는 맑고 명랑한 얼굴이었다. 나처럼 잘 웃지만 나처럼 음식을 우적우적 먹지는 않는 얌전한 아가씨였다. 우리와 처음 만난 사이니까 맘 놓고 밥 먹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겠다. 여인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남정은 배웅을 해주러 나간 뒤, 내 인물평이 궁금했던지 정옥씨가 전화를 해서 자기 며느릿감 어떻더냐고 물어왔다.


“여보슈, 중요한 건 내 생각이나 그대 생각이 아니고 그대 아들 생각이요. 걔의 선택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전적으로 맡기시오. 지나친 기대와 지나친 참견은, 특히 외아들이었을 때에, 더구나 ‘내 솔메이트’라는 애칭으로 불러왔을 때는, 제발 자제하기 바라오. 결론적으로, 종합적으로 말해서 참 이쁘고 참한 색시요”라고 일러주었다. “어머니들이여, 그대들은 그대들 인생을 사시고 아들의 인생은 아들이 살게 놓아주시오! 스스로 날개짓하여 날아가게 자유롭게 놓아두시오, 이미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아들에게 매달리고 서운해하고 속앓이를 하지 마시오! 딸이야 내가 못 낳아봐서 할 말이 없지만...”


어제 시위현장에서 들고 다닌 “박근혜 퇴진” 팻말을 우리 차 뒤창에 붙였다. 전국에서 모든 차량에 “박근혜 하야하야하야”라는 팻말을 붙였으면 좋으련만.... 그걸 붙이고서 들어오니 “그러다 잡혀가시면 어쩌려고요?”라는 엽이의 농담. 젊은이는 농담이지만 늙은이들에게는 이승만 독재,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겪은 공포가 잠재해 있을 게다. 


지난 3년간 최고권력을 애오라지 복수심으로 휘두른 짓으로 미루어, 또 전직 대법원 행정처장을 지냈던 자가 “너희들이 까불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보여줄지도 몰라!”라고 국민을 겁박한 참이라, 저 여자가 어려서 오빠라고 불렀다는 자가 마지막 술상에서 제 아비에게 했다고 떠돌던 말, “크메르를 보십시오. 100만 명쯤 쓸어버려도…”라는 말마디를 되새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하지만 공포야 말로 독재의 텃밭이다. 오늘 아침 성당에서도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때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2-29)는 말씀이 낭독되었다. 보스코가 어느 ‘팟빵’에서 한 말처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저들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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