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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올해는 내 인생 최고의 해’
  • 전순란
  • 등록 2016-11-24 13: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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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흐림


요즘은 어느 새 겨울인가 하면 갑자기 봄이 와 있고, 봄옷을 찾아내 걸치려 하면 벌써 여름이다. 여름은 가을과 하루 이틀 어깨동무를 하더니만 단풍잎을 갈아입고 뽐을 내기도 전에 거무죽죽하게 얼어버린 나무들이 초겨울을 알린다.


휴천재 앞산도 부옇고 마리오가 보내준 트란스악콰 성당의 갈가마귀들도 부옇다 


하늘은 푸르고 높아 까마귀 날아오른 자리에 ‘까치밥’으로 남은 홍시 반쪽이 붉은, 가을을 기대하던 보스코는 “요즘 하늘은 왜 저렇게 뿌옇기만 하지?”라고 연달아 묻는데 낸들 어찌 알리? “세상 돌아가는 것도 오리무중인데 저 하늘 위에서 하느님 하시는 속내를 어찌 알겠어요?”


가을걷이를 하며 마당의 꽃밭을 손도 못 댔는데 보스코가 장갑을 끼고 낫을 들고서 장미가지를 전지하고, 공작꽃 마른 걸 베어냈다. 공작꽃대에 마른 씨앗은 텃밭 잡초가 무성한 구석에 흩뿌리고 기욱이네 밭에도 뿌릴 생각이다. 제동댁이 깔끔하게 농사짓던 밭을 “우리 땅 내놓아라!”던 기욱엄마가 아무 경작도 안 하고 묵정밭으로 버려두자 이태 사이에 고사리와 시누대 그리고 온갖 잡초가 점령하고 말았다. 제동댁 부지런한 성화에 뿌리만 감추고 숨죽이던 시누대와 큰대가 밭두렁부터 침략해 오는 중이니 저것들이 휴천재 마당 아래 축대까지 오는 데는 한두 해면 넉넉하다.



점심을 먹고서 보스코랑 포인세티아 화분 둘을 이층 마루로 옮겼다. 이어서 나는 지난번 분갈이를 한 제라늄 화분들을 집안에 들이고, 테라스 밑에서 여름을 난 난초들도 다듬어 이층벽돌방에 올려놓았다. 지난 5년간 해마다 집안에서 월동하고 다시 화단에 심겨지는 베고니아는 흙갈이하여 화분에 담아 식당채 창가에 들여놓았다. 그 곁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말구유가 자리잡을 게다.


보스코는 텃밭으로 내려가 멀칭했던 검정비닐들을 걷어내고 밭에 부린 퇴비 부대들을 모조리 거둬서 손수레에 싣고서 학교 앞 쓰레기하치장까지 내려갔다. 때마침 함양군 쓰레기 수거차가 도착해서 바로 실어 보냈단다. 밭고랑에 풀 못나게 깔아놓은 현수막 천들도 거둬서 한데 모아두었다. 텃밭의 호박넝쿨을 자르고 당기고, 뽑아둔 옥수수대궁과 가지대궁들도 태우기 쉽게 쌓아놓고 올라오니 다섯 시가 넘었다.




빵기가 두 주간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이틀 후에는 다시 방콕과 네팔을 찾아 떠나야 한단다, 두 주간이나. 아빠 얼굴을 못 보는 애들도 그렇지만 저토록 오래 집을 비우면 며느리가 힘들겠다 싶어 미안하고, 어려운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선한 일이라는 명분으로 견뎌내며 애들을 잘도 건사하고 있어 며느리가 참 고맙다.


우리 느티나무 독서회에서는 봄이면 문학기행으로 하루 여행을 다녀오고, 가을엔 단체관람 영화구경을 하는데 오늘이 영화감상 날이다. 거창 메가박스로 가서 우선 저녁을 먹는데 ‘올해는 내 인생 최고의 해’를 자랑하는 정옥씨가 저녁을 쐈다. 지난 두해에 중고등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뒤이어 사회복지사 자격을 따느라 전문대 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니 이젠 소원대로 시인으로 등단하는 일만 남았다. 농사꾼으로서 조용히 농사만 짓다가 어느 날 시(詩)에 눈이 뜨여 저렇게 용기를 내어 합격증들을 따내는 자신의 용기가 너무도 자랑스럽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그니가 내는 저녁을 맛있게 먹으면서 모두가 함께 기뻐해주었다.


영화관에 걸린 ‘신기한 동물사전’, ‘가려진 시간’, ‘형’ 셋 중에 나는 ‘가려진 시간’을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맞아 다함께 ‘형’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사연이 있어 감옥에서 가석방으로 임시 만난 배다른 형제가 하나는 눈이 멀고 하나는 췌장암 말기로 죽음을 기다리며 동기애를 깨우쳐 가는 뻔한 줄거리였지만 감정이입에 탁월한 우리네 여인들은 극장을 나오며 눈들이 벌게져 있었다. 이렇게 서로의 맘을 살피고 스크린 앞에서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아우들과 함께할 수 있으니 참 좋다.


아버지처럼 보스코를 키우신 마신부님, 오늘이 탄신 100주년이란다


60년전 광주살레시오중학교가 개교하던 날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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