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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아이들 소리가 사라진 마을
  • 전순란
  • 등록 2016-11-28 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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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7일 일요일, 맑음


휴천강으로 물안개가 가득 흐른다. 구름이 바람에 흐르듯 바람이 슬쩍만 밀어도 물안개 위로 산봉우리가 나타나고 찬란한 태양이 왕산으로 오르는 시각이다. 아침잠을 일찍 깬 순애씨는 문상안길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내려와서는 “왜 배추를 아직 안 뽑았을까?” “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왜 나지 않을까?” “어째서 어디서도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한다. 배추는 12월 중순에 가야 뽑아서 김장을 담그고, 노인들만 사는 동네라서 개도 닭도 먹이 주는 일이 힘 부치고 귀찮아서라 했다.



여태 해오던 농사나 겨우 이어가고 언덕배기마다 묵정밭, 묵정논이 늘어만 간다. 지게를 지고 걷는 유영감님도 걸음을 보면 지게가 가는지 사람이 가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비칠걸음으로 바뀐다. 농촌에서는 이렇게 개도 닭도 사람의 아가들도 여러 생명이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머잖아 저 7, 80노인들이 사라지면 농사도 끝나고 농촌은 없어질까?



9시 30분, 순애씨가 성심원 미사에 가고 싶다 하여 산청으로 갔다. 미루네, 모세, 그리고 어느 선교사를 만나고 싶어 하던 길이다. 다행히 기대 밖에 모세씨와 그 선교사도 미사 중에 만났고 미사 후 미루네가 성심원을 한 바퀴 돌면서 그곳 시설들을 안내하였다. 14처가 있는 십자가의 길, ‘지리산 쉼’(미루네가 효소단식과 힐링을 지도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갇혀 살다 간 나환우들의 한 많은 묘지, 노랑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아름드리 소나무길, 세월호 원혼들이 팔랑개비와 리본이 되어 강바람에 휘날리는 ‘추모공원’을 돌아보았다.



요즘 세찬 정국에 밤잠을 이루지 못해서 양주로 잠들어야 한다는 박근혜 머리맡에 세월호 혼령들이 밤새도록 마파람 소리를 내며 서성거리고 있을 게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때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리야?”라는 저 뻔뻔한 얼굴을 보면 참으로 역겹다. 양심의 고통은 자신과 주변을 정화시켜 구원에 가까이 가는 축복이 될 수도 있으련만, 가책을 모를 만큼 인두로 지져버린 양심은 본인도 주변도 영원한 파멸로 끌어가는 저주임이 한눈에 보인다.


점심은 순애씨가 가보고 싶다는 함양 상림 가까운 샤브향에서 미루네랑 함께 먹고, 콩꼬물에서 커피와 눈꽃빙수를 먹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상림은 걷지 못했다. 카페 ‘빈둥’과 은진씨를 못 보아 순애씨가 서운해 했다.


보스코는 미루네가 휴천재로 모셔다주기로 하고, 나와 순애씨는 진주 가까운 산골마을로 갔다. 순애씨 친구의 친정어머니를 찾아뵙는 길이다. 82세의 할머니는 우리집 잔디밭 만한 마당에 상추, 시금치, 겨울초를 가득 심어 여섯 자녀들에게 파 한 뿌리라도 더 보내려고 고생고생 중이다. 김치와 차, 단감과 유자차가 순애씨에게 맡겨졌다. 내 차의 트렁크가 큰 죄로, 하나 가득 실어 보내시는 ‘엄마의 손길’로 저 어머니는 그 낡은 당신 몸뚱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어 보내고 낡은 몸만 집에 남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시다. 



우리 둘이서는 서둘러 휴천재로 돌아왔고 밤이 이슥한 시각에 순애씨는 인천으로 떠났다. 뭔가 해 준 것 없이 떠나보내니 참 미안하다. 하룻밤 더 묵으면 좋으련만 내일 점심에 또 다른 지인을 만나는 약속이 있단다. 타인을 위하고 살자면 늘 바쁘기 마련이다.


마을 앞 문정식당 아줌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조의금을 들고 찾아갔다. 몇 달 전 부면장님 병실에서 만났던 건강한 아줌마다. 분도수도원 이형우 아빠스가 급환으로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는 문자가 낮에 떴다. 장례일인 모레는 광주에서 보스코의 강연이 있어 내일 중으로 문상을 다녀와야 한다. 11월은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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