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기업 삼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반도체 직원에겐 보상금 500만원 제안, 얼굴도 모른다는 정유라에겐 300억원을 쾌척한”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맑음
여자들이 한번 움직이려면 걸리적거리는 일이 많다, 더구나 여럿이면. 내겐 물론 제일의 염려가 ‘보스코’ 하나고 그 외에는 특별히 맘 쓰는 데 없는데, 친구들은 그게 큰아들 빵기가 멀리 사는 덕분이란다. 오늘 만나 점심을 하기로 한 친구 하나가 “며느리가 손주 봐달라 부탁하는데 어떡하냐?”고 물어왔다. “나 선약 있어서 안 되겠다”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런 대답을 못하는 게 ‘할머니’다.
나는 두 아이가 멀리 있어 그립기만 한데 친구들은 그런 내가 참 부럽단다. 이뤄진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별 볼 일 없는 현실로 퇴색하지만, 떠나간 사랑은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아쉽고 그립고 아름다운 법. 그래서 떠난 사랑만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노래가 될까?
한강은 이 시국에도 유유하게 흐르고...
큰아들이 대지진 수습 후속작업으로 가 있는 카트만두 너머로 히말라야는 여전하고...
이웃 친구들과 점심하자는 약속을 접고 “에이, 지리산에나 빨리 내려가자”하며 짐을 챙겨 나섰다. 아침시간이라 전철도 트래픽이어서 평소보다 두배여서 차표도 못 끊고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님에게 현금을 내밀며 “나 기다리셨죠? 이제 갑시다!” “???” 하도 당당한 내 기세에 기사님도 씨익 웃고 만다. 잘 아는 동네 아저씨 같아 집에 반은 간 기분(사실 서울을 오가는 함양버스 기사들은 거의 나를 기억한다).
승객 전부 열 명이나 탔을 법한 텅빈 차안을 가리키며 “입맛대로 앉으쇼” 한다. 책이라도 읽으려고 덜 흔들리는 앞자리를 골라 앉는다. 3, 4번 좌석을 좋아하는데 아줌마 옆자리 창가에 4번 자리가 비어 있어 배낭을 내리고 앉았다.
“친정엘 가나 봐요?” “아뇨” “어디 살아요?” “휴천 문정요” “귀농했어요?” “아뇨. 귀촌요” 간단한 취조를 마치더니 아줌마는 곧 잠들어버린다. 뒷편 의자에서 아저씨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차안은 한밤 중. 나도 하품에 전염되어 슬그머니 눈이 감긴다.
“죽암 휴게소입니다” 하는 안내방송에 눈을 뜨고 앞에서 혼자 떠들던 TV를 바라본다. 삼성 이재용이 어항 속 금붕어마냥 입만 벙긋거린다. 우리의 조용한 취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사님이 소리를 낮추었던가 보다.
소리가 안 나도 우리는 안다.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이 하는 말이니 그쪽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대가성이 아닙니다” 양심이라고는 털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권이나 재계나 똑같다. 오죽 하면 턱없는 소릴 하는 친구들에게 “너 청문회에 갔다 왔냐?” 라고 할까? 우리 살아생전 정직한 세상을 단 한번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가정주부여서인지 나에게는 청문회 실황중계 전체에서 윤소하 의원(정의당)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반도체 직원 고 황유미씨에겐 보상금으로 500만원을 내밀었고, 당신이 알지도 못한다는 정유라씨에겐 300억원을 내민 게 삼성, 당신네 직업윤리요”라던 지적이 기억에 남는다. 나 죽을 때까지 남을 게다. “삼성 너희도 공범이다.”
집에 전화를 해보니 귀요미 미루네가 와 있단다. 보스코가 혼자 집에 있는 게 못 미더워 ‘독거노인’을 위로하러 온 착한 미루네한테 마천 중국집에서 점심을 샀다는데, 배달은 턱도 없고, 맛은 묻지마고, 웬만한 메뉴는 ‘2인분 이상’이라야 주문을 받는다.
그래도 세 사람은 점심 후 오도재 전망대에 올라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을 위시해서 그 기다란 산허리를 두루 본 것으로 위로를 삼는 모습이다. 나물에 꽁보리밥을 먹는다 해도 대자연이 모자람을 채워주는 곳이 지리산이다.
서울에서 지낸 사흘은 날마다 새벽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바삐 움직여선지 휴천재에 오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집이란 다 같아도 같은 게 아니다. 편안히 눈을 붙일 수있는 곳이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