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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광화문, 그 뜨거운 연가
  • 김혜경
  • 등록 2016-12-08 10:40:45
  • 수정 2016-12-08 10: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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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큰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고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먼저 내달리던 물이 빈 웅덩이를 채우면, 뒷물이 그 곁을 스치며 새로운 선두가 된다. 부드러운 힘으로 단단한 것들을 깨고 갈아 제일 낮은 곳에서 가장 거대하고 육중한 존재로 완성된다. 


▲ 지난 3일, 서울에서 열린 6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이날 광화문 삼거리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로 가득했다. ⓒ 최진


주말이면 이 물처럼 광화문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낯모르는 이가 바닥이 차다며 두툼하게 접은 신문을 건네며 앉으란다. 촘촘하게 앉은 옆 사람과 촛불도 나누고 눈인사도 나눈다. 멀리 있는 스크린은 잘 보이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발이 시려온다. 허리도 아프다. 그래도 목청껏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고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커다란 촛불의 파도가 끝도 없이 출렁이고 있다. 자유롭고 명예로운 개인 개인의 ‘자발적 모임’,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뜨겁고 뜨거운 ‘시민의 불복종’ 현장이다.


19세기를 산 사람이면서 21세기적인 감각을 지녔던 환경론자이며 철저한(좋은 의미로!) 개인주의자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1817-1862). 그는 함석헌과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은 물론 헨리 밀러, 마르셀 푸르스트, W.B. 예이츠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소로우는 멕시코 전쟁이나 노예제도 등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하는 정부에 대해 ‘불복종’이라는 방법으로 저항했다. 무슨 대단한 사회운동가로서 사회를 변혁시키려 했던 게 아니다. 당시 그가 섰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 그러니까 주 정부가 묵인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던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위해 6년 동안 인두세를 내지 않았고 결국 수감되는 길을 택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개혁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가지고 이바지 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국가는 흔히 그들을 적으로 취급한다”(15쪽)는 거다. 그렇지만 겁먹지 말란다.


소로우는 개인이 저마다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사람 사람마다 정의를 알고 실천하게 되면 사물(事物)을 변화시키고 관계(關係)까지도 변화시키게 된다고 했다. 바로 그런 게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니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서슴지 말고 몸이나 재산으로 주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중지하란다. 단 한 명이라도 당장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라면서 그 결과로 형무소에 가게 된다면, 오히려 결국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거다. 비록 시작은 쓸모없고 하잘 것 없는 듯 보여도, 옳은 일은 한 번 행해지면 계속 행해지게 마련이라면서 말이다. 


기껏 토론이나 하면서 죽치고 앉았거나, 다음 선거 때는 바꿔야지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지금 움직이라는 거다. 단지 종잇조각 하나에 기대를 걸지 말고, 영향력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온몸으로 투표하란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라면서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으면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는 거다. 


정의를 생각하는 개인이라면 전체를 발효시킬 수 있는 ‘효모’가 되란다. 부당하게 사람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곳, 그가 있을 가장 떳떳한 장소는 감옥이라면서 말이다. 주 정부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삶을 사는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은 바로 감옥이라는 거다.


소로우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사실, 양심적인 사람들이 정의롭게 사는 거지 법이 정의로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길러야 한단다. 입법자들의 말재주에만 우리의 장래를 맡기지 말고 일반 국민의 풍부한 경험과 불만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정부의 잘못을 고쳐나가야 한다는 거다.   


정치제도가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다시 민주주의로 변해 온 것을 봐도 개인에 대한 존중을 향한 진보였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도달할 수 있는 제일 마지막 진보의 단계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묻는다.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진일보한 정치제도는 없는가? 좀 더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는 없는지. 국가가 개인 하나하나를 보다 더 독립되고 커다란 힘으로 볼 수는 없는지. 국가의 권력과 권위가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개인에게 해줄 수는 없는지. 


더 나아가 소로우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 국가에 대해 무관심한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도 않는 국가, 그렇게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 여기지 않는, 그런 국가를 꿈꾸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롭고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 할 수 있다 했다. 이렇게 개개인의 자유와 의사를 존중하는 국가가 있다면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나도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이런 국가관을 가진 소로우가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과 정부를 보면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고 말겠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라가 다 있나 싶을 게다. 하지만 그가 광화문에 빽빽하게 들어선 ‘시민들’을 본다면, “너희가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겠다”며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촛불들을 본다면, 아마 깜짝 놀랄게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불순종’의 규모에 한 번, 그 큰 규모의 자유로운 일사불란함에 두 번, 무엇보다도 ‘불순종하는 시민들’의 그 뜨거운 열기에 세 번쯤?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삼년 반 동안 이 땅의 진짜 대통령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았음에도 대한민국이 삼년 반 동안 이어졌다는 건, 이 땅의 주인이 시민 여러분이었다는 게 증명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국가원수에 준하는 박수,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라의 국민이란 게 참 한심하고 아이들 보기에도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광화문을 가득 채운 우리들의 따뜻한 온기와 뜨거운 연가를 나는 믿는다. 



“너희가 안하면 우리가 한다”(커버스토리/이진순의 열림), <한겨레신문> 2016년 12월3일, 3쪽. 방송인 김제동을 인터뷰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의 대표 이진순의 글 중에서.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광장에서 김제동의 발언, 앞의 기사에서 재인용.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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