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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전순란
  • 등록 2016-12-16 10:01:51
  • 수정 2016-12-16 1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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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4일 수요일, 맑음


아침부터 보스코가 3층에 올라가 봉재 언니가 새로 짓는 집에 쓸 만한, 우리는 안 쓰는 전등들을 찾아 들고 내려왔다. 코너에 다는 센서등이 몇 개 되는데 보기에도 낡아 보여 남도 못주고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들이다. 기다란 새 등도 하나 챙겼다. 언니는 무엇이든 끝까지 귀하게 쓴다. 언니네 집에 가면 남긴 음식 마지막 한술까지도 깨끗하게 먹는다. 농사 짓느라 수고하는 농민의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도 언니에게는 참으로 귀하다.


내가 오후에 그 물건을 갖다 드린다니까 당신이 휴천재로 오시겠단다. 전번에 언니가 ‘크림 파스타’를 먹고 싶다던 말이 생각나 집으로 오시라 했다. 생크림, 버섯, 브로콜리, 새우 중 버섯과 브로콜리가 없어 진이엄마한테 갔더니 버섯과 호박을 준다. 그리고 여름내 그 무더위 속에서 따낸 블루베리를 한 상자 가득히 선물해 줬다. 보스코 시력을 지키라고, 손주들 오면 먹이라고…



진이엄마가 블루베리를 한 상자 줬다. 송알송알 맺은 두 부부의 한여름 땀방울이다


우리 셋은 다른 요리 없이 스파게티만 양껏 먹고 포도주도 한잔씩 마시며 언니의 ‘라이프 스토리’를 감명 깊게 들었다. 모든 엄마들의 살아온 얘기, 한 여자의 절절한 허스토리는 책으로 묶으면 다들 서너 권의 책이 된다. 우리의 지나간 세월은 내 기억이 입힌 옷 속에서 아직도 화안하게 빛을 내고 있던가, 다시는 들춰보기 싫은 암갈색 아픔으로 칙칙하게 퇴적되거나 둘 중 하나다.


봉재 언니의 어린 시절, 소녀 시절, 청년 시절, 모두가 찬란한 수정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심지어 눈물겨운 가난이나 절망, 아픔과 좌절까지도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 모든 게 지금처럼 아름다운 언니 얼굴을 빚어낸 과정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아무렴 어때? 모든 게 은총인 걸”(베르나노스)이라는 한 마디로 간추려진다, 우리 누구나의 삶이.



빵기가 엊그제 내가 한 전화에 매일 전화로 화답을 한다. 오늘 큰손주 시아의 목소리도 섞여 아침 창밖의 종달새처럼 달콤하게 들린다. “시아야, 한국 오면 뭘 제일 하고 싶어?” “한국 과자들 실컷 먹고 싶어요” “그래, 할머니가 슈퍼마켓 과자 코너를 싹 털어서 사주지! 우리 큰손주 원 없이 먹게!” 내 허풍에 깔깔 웃는 사랑스런 우리 손주, 걔한테 뭔들 못 해주겠는가? 나는 벌써부터 어멈과 아범 모르게 나와 큰손주만 함께 공유할 반란과 음모를 머릿속으로 꾸미며 혼자 즐거워 웃는다. 어여 빨리 오기만 하려무나!


저녁엔 ‘느티나무독서회 송년모임’. 윤희씨 빼고 다 모였다. 예전 총무 미정씨, 올해와 내년에 총무를 맡는 혜진씨에게는 조그만 선물이 전달되었고, 나는 통진당 해산을 다룬 「이카로스의 감옥」을 한권씩 아우님들에게 선물하여 내년에 읽고 토론하기로 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김재규 평전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썼던 문영심 작가가 썼으니 흥미로울 꺼다. 아직도 레드컴플렉스에서 놓여나지 못하여 선뜻 빨리 읽고 토론하기를 버거워 해서 내년에 모든 시국문제가 풀린 후, 12월에나 함께 토론하기로 했다.


오늘 모임에서 제일 감격적인 장면은 희정씨가 정옥씨에게 책을 선물하며 읽어준 장문의 편지였다. 50대 주부의 그 힘든 농사와 시집살림 중에도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먹으며 중등학교 검정고시에 2년만에 합격하고, 지금은 ‘2급 사회복지사’, ‘초급대’ 과정을 공부하는 친구를 격려하는 글이어서 읽는 희정씨도, 받는 정옥씨도, 옆에서 듣는 우리도 모두 눈물바람이었다. 붉은 띠 두른 노동현장 아니고 자그마한 시골의 아낙들이 모인 자리이지만 김남주 시인의 격려가 절절한 저녁이었다.


... ...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강원도에 큰눈이 내렸다는데 사진작가 마리오도 알프스 산마르티노의 설경을 보내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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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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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subok212016-12-19 05:56:43

    "모든 엄마들의 살아온 얘기, 한 여자의 절절한 허스토리는 책으로 묶으면 다들 서너 권의 책이 된다." 사람마다 인생살이는 몇 권 소설에 담을 수 없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성염 나니 부부는 행복하십니다 그려. 산을 찍은 사진이 황홀합니다.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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