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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이야기 4
  • 이상호 편집위원
  • 등록 2015-05-19 1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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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틸료 그란데 신부


“류틸료 그란데 신부를 모르고서 로메로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살바도르에서 로메로 시복식을 주관하는 교황청 빈센쪼 파글랴 대주교는 이렇게 단언한다. 

 

1977년 2월 23일, 산살바도르 교구장에 취임한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평가는 확연히 둘로 갈라졌다. 단순히 말하자면, 기득권 세력은 반겼고, 가난하거나 개혁적인 사람들은 한 숨을 쉬었다. 그는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보수주의자였다. 


그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변했다. 보수에서 진보를 넘어 급진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어느 쪽에서 보든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누가, 무엇이 로메로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예수회 신부인 류틸료 그란데 신부의 피살이다. 로메로는 대주교가 되기 전에도 농민 등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부 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분개하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적극적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최대 이슈 중 하나 인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농민들과 연계된 진보적 사제들을 비난하는 다른 고위 성직자와 마찬가지였다. 근본적인 보수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란데 신부의 피살은 이런 로메로를 순식간에 완전히 새로운 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대주교가 된지 3주일이 채 안된 1977년 3월 12일 그란데 신부가 살해됐다.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시골 교회로 가던 중 이었다. 


신부를 마차에 태워가던 노인과 7살 소년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란데 신부는 농민들의 협동조합 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 진보적 성직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기회를 노리다 신부와 아무 죄 없는 두 명 등 3명을 죽였다. 


그란데 신부는 대농장주의 개가 그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자식들보다 훨씬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말을 자주했었다. 그의 죽음은 로메로에게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주검을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그가 했다는 행동 때문에 그를 죽였다면, 그렇다면 나도 역시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것은 그란데 신부의 주검 옆에 모여든 농부들이 보여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일은 자신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증언과 예수님은 이제 다른 새로운 신부를 보내 줄 것이라는 그들의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로메로에게 그란데 신부가 했던 것과 같이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없이 물었고, 그는 진실로 그렇다, 라고 답했다. 로메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다시 한 번 부름을 받았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로메로는 대통령에게 두 번 씩이나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립 서비스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언론들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를 보고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전통처럼 되어버린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 회피는 억압이나 부패에 대한 소극적인 사후 인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정부 관리들과 함께 하는 공식 행사에는 앞으로 결코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로메로는 더 나아갔다. 논란이 많았지만, 그란데 신부 장례미사 다음 일요일 전국 모든 성당의 미사를 취소했다. 모든 교구의 독실한 신자들을 초청한 대성당 층계에서의 미사만 제외했다. 이 미사에 무려 10만 명이상이 참석했고, 이는 정부와 군부는 물론이고 교회 일부에서도 격렬한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미사로 민중들은 하나로 뭉쳤고, 그는 해방신학의 원조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신을 안다는 것은 곧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뒤늦게 받아들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게 됐다. 


그는 또한 정부에 대해 분명히 경고했다. 사회정의를 위해 정치 분야나 공동선에 있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성직자들을 정치가나 파괴분자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그 후 로메로는 가난과 사회적 불의, 암살과 고문 등에 대해 공개적 적극적으로 앞장서 비난했다. 그란데 신부의 피살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이을 또 다른 좋은 목자를 원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마침내 새로운 좋은 목자를 얻었다. 


이는 엘살바도르에 있어서 놀랄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가 그들의 편이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않았고, 교회 고위층이나 정부는 배반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피살되기 직전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은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처럼 살 것입니다. 밀알이 죽었기 때문에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떨어져 죽은 그 밀알이 바로 그란데 신부인 것이다.

 

그란데 신부에 대해서도 현재 시성 절차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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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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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gmin302016-04-01 23:04:53

    로메로 신부께서도 60에 회심을 하셨으니,
    여러분야에서 회심이 필요한 많은 지도급 인사들도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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