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밀차를 타고 가지만 대통령전용기에서 내리는 위엄
  • 전순란
  • 등록 2016-12-21 10:07:44

기사수정

2016년 12월 19일 월요일, 맑음


‘유무상통’의 새벽미사에 나오는 어르신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시 눈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다. 한밤중에 복도를 지나면 밤새 TV를 켜둔 방들이 많다. 본인들이 가는귀가 먹어 이웃방에 소음이 들리리라는 생각도, (아파트촌의 ‘층간소음’ 아닌) 양로원의 ‘방간소음’으로 인한 시비도 전혀 없다.


한 달에 한번 엄마를 보러 가 엄마 곁에서 자며 지켜보면 엄마가 잠결에 하는 몸놀림들이 더 정확하게 관찰된다. 주무시기 전에 도우미 아줌마들이 기저귀를 채워드리는데도 주무시다 두세 번 화장실에 가는 동작을 어둠 속에서 지켜본다. 



먼저 화장실 쪽 붙박이 옷장을 향해 몸을 일으키시고, 손을 바꿔가며 눈을 감은 채로 벽면을 짚는 폼이 양손으로 농구공을 패스하는 동작 그대로다. 이화여전 시절 국가대표 농구선수는 96세에도 가락이 남아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유난히 자주 넘어져 엄마의 눈두덩과 뺨이 ‘상처뿐인 영광’이었는데도 처녀시절의 슬라이딩 기술로 뼈를 상하신 적이 한번도 없다.


아침식탁에서 문섐 엄마를 못 봬 방으로 찾아갔더니 지난 주 두 딸이 와서 노곡교회를 함께 다녀왔다고 자랑하신다. 이곳 노인들은 방앞에 놓인 신발들의 숫자로 행복해지고 부러워하고 또 속상해 한숨을 쉬신다. 두 발로 부지런한 젊은 자녀들의 신발,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손주들의 신발이 늘 그리운 분들이다.


교회를 혼자 가면 운전하는 교회차량의 장로님이 짐도 받아주고 부축도 해주지만 남의 폐를 끼치는 듯해서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이라신다. “이젠 바보가 다 되어 사람 구실도 못한다우.” 탄식하신다. 울 엄마가 당신을 보면 ‘사람’이라고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데 고맙단다. 노인들에게는 당신이 사람이라는 이미지마저 희미해지는 것일까? 


엊저녁 식사 후 사위가 밀어주는 밀차의 좁은 바가에 엄마가 걸터앉아 복도를 지나실 때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아들이야, 사위야?” “거, 대산과 뭔가 한 사람이잖아, 엘레베타에 사진 붙은?” “신부 아버지 말야”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늘 같은 사람들. 그런데 엊저녁 그 장면의 볼거리는 밀차를 타고 가며 그 노인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울 엄마의 위엄! 서울공항에 도착한 대통령전용기에서 트랩을 내려오며 환영인파에 손을 흔들어주는 국빈의 동작 그대로였다!


아침에 엄마와 헤어지며 우릴 따라나서는 엄마를 도우미들에게 떠맡기고 나와서 10시 30분경 서울에 도착. 도봉면허시험장에 들러 기간이 두 달 쯤 지난 보스코의 면허증(장롱면허)을 갱신했더니 약간의 과태료를 받고 5년을 연장해 준다. 더구나 ‘어르신창구’가 있어 절차가 불과 15분 안에 다 끝났다. ‘우리나라 좋은나라!’ 정치만 빼면....



이어서 오후 4시로 보스코의 치과병원 예약도 앞당겨 갔더니 11시30분에 진료와 잇몸치료를 위한 내일 예약을 마치고 스켈링까지 해주었다. 나도 예약한 터라 의치 자리에 임플란트를 할 것인가, 금니를 새로 할 것인가도 의논하였다. 며칠 후 귀국할 시아 시우의 치아검사도 예약하였다. 곽선생님은 우리 치아 담당 가정의시다.


집에 와서 짐을 풀고(지리산에서 짐 싣는 것을 지켜보던 진이엄마가 ‘아예 트럭을 사세요’라고 놀렸다), 오후 내내 일손을 멈추지 못했다. 종류대로 가져온 김장김치들을 김치냉장고에 넣고, 아래층 대청소도 하고, 국염씨한테 담가온 섞박지를 정릉에 갖다주고, 그니의 독일여행 선물로 셀텐과 초콜릿과 심지어 배추김치도 받아오고....



일기를 쓰다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오는 엽이한테 “오늘 늦었네?” 했더니만 “오늘은 빠른 셈이에요. 보통 새벽 3시에 일이 끝나요”란다. 신혼중인 직장동료는 새벽 3시에 들어와 7시에 나가는 신랑을 두고 신부가 엉엉 울어 아침마다 아내를 달래고 나오느라 여간 괴롭지 않단다. 그러면서도 지난 주말 색시 감 선보이려 함양 다녀온 얘기를 신나게 들려주는 품이 ‘우리집 제3대 집사’가 새 둥지를 만들어 떠날 시간이 가까워 옴을 실감케 만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