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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함무이!’ ‘하부이!’
  • 전순란
  • 등록 2016-12-23 09:51:20
  • 수정 2016-12-23 1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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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비바람


테라스 화분걸이 난간에 내놓은 플라스틱 김치통(우린 ‘측우기’라고 부른다)에 고인 물을 재보니 지난 밤에 60밀리는 족히 비가 내렸다. 이 비가 눈이 되면 훨씬 낭만적이겠지만 손주 맞으러 가는 길에 마음만 바빠 자동차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낭패이리라.


성탄 9일기도에 들어간 아침기도에서 ‘즈가리야 노래’에 나오는 후렴을 그레고리안 성가로 들려주겠다면서 보스코가 잠시 일어서기도 한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에게 ‘추억’이기도 하다. 소신학교를 겸하던 살레시오 기숙사에서 보낸 그가 고등학교 3년간 원선오 신부님의 지도와 반주로 주일마다 그레고리안 성가 미사를 올리던 추억이다. 라틴어를 배우고 학위를 받아 가사내용을 알고서 따라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는 남다른 감회를 주나보다. 



솔렘 수도원 수백명 수사들이 불러도 한 사람이 부르듯 다듬어진 아카펠라를 듣노라니 ‘지리산종교연대’에 꾸려진 ‘길동무 중창단’이 생각나 쿡 하고 웃음이 난다. 지리산 일대의 환경운동 행사마다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스님, 수녀님, 교무님, 목사님이 나서는 모양새는 멋있는데 목소리가 가다듬어지지 않아 자타가 ‘비쥬얼 합창단’이라고 놀린다. 자칫 목청 큰 노목사님 혼자서 시작하고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는 점에서는 솔렘의 그레고리안 합창과 흡사(?)하다.


우리가 간혹 주일미사를 가는 ‘운봉성당 합창단’도 처지가 비슷하다. 본당회장님 혼자서 성가대요 단장이고 따님이 풍금 반주를 한다(엄마는 교우들이 미사 후에 먹을 점심밥을 하는 중). 기차 화통 삶아먹은 만큼 목청 큰 회장님 혼자서 4부합창 전부의 소리를 가늠하고 남는다. 나머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야 눈이 침침해서라도 성가 가사도 못 읽은 분들이고... 아무렴 어떠랴, 하느님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찬미가를 들어주시는 분인데다 180억 광년의 광활한 우주에서 울리는 저 모든 소리 가운데 만물의 이 영장들이 창조주께 바치는 소리가 가장 흐뭇하시다는데?



우리도 세상 어린이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고 걔들이 소리 내는 ‘함무이!’ ‘하부이!’ 두 마디가 가장 듣기 좋은, 두 손주를 맞으러 엄청난 빗길과 바람 속에 인천공항으로 달리는 중. 12시 40분에 공항에 도착해 보니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는 이미 도착해 있다. ‘여권심사대 통과 중’이라는 문자가 뜨고, 간간이 열리는 입국장 문틈으로 시아와 시우가 뛰어다니는 모습이 얼핏얼핏 보인다.


빵기네보다 조금 먼저 두 딸을 데리고 나오는(유학생 부부로 보이는) 식구네 짐이 산더미 같다. “짐이 많네요. 유학하고 돌아와요?” “네! 그러긴 한데 집사람이 이렇게 짐을 엄청 싸 갖고 다니는 걸 즐겨요” 어느 여잔들 폼 나게 여행가방 하나만 달랑 끌고 미니스커트에 하이힐 소릴 ‘또옥똑’ 내면서 나다니고 싶지 않을까만, 두 딸의 엄마쯤 되고나면 운동화에 헐렁한 바지에 커다란 짐수레를 끙끙 밀고 나오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엄마가 되고 나서’ 공항을 드나드는 내 차림과 행색이 늘 저랬었다.



드디어 아들네 카트가 보이고 뒤따라 나오는 발들이 달려와 내게 안기는 감격이라니! 훌쩍 컸지만 몸피는 건강하게 바짝 말라 있다. “함무이, 많이 기다리셨죠? 우리도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요” “내 새끼들, 그래 우리 점심 먹어야지. 짜장면?” “네!” 그 많은 짐을 끌고 건너편 역사(驛舍)로 건너가 지하실에 있는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탕수육도 시키고... 입이 짧은 작은놈은 자기 접시를 자꾸 나한테 밀어주고 내가 먹으면 “먹어줘서 고마워요”란다(아범이 ‘잡숴줘서 고마워요’로 바로 잡아주고).



외가와 친가를 세 번 걸려 오가게 일정을 짜서 오늘은 일단 청담동 외할머니댁으로 넷이 떠나고 둘이서만 순환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밤 10시경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하는 두 손주의 인사가 영상카톡으로 왔다. 밖에선 비바람이 엄청 불어제끼는데 내 맘엔 따스한 소나기가 좍좍 쏟아지는 기분이니 오늘밤엔 푹 잘 수 있겠다.


두 손주가 비행기에서 남겨 싸들고 온 케이크와 쿠키 등으로 저녁식사하는 하부이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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