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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이야기 5
  • 이상호 편집위원
  • 등록 2015-05-20 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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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   


한 언론인이 로메로에게 물었다. “해방신학에 동의하십니까?” 로메로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해방을 단지 물질적인 해방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말씀하시는 해방입니다. 나는 바오로 6세 교황님과 같습니다.” 

 

로메로가 교회 내에서 위치가 한 단계씩 올라갈 시기는 남미 교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제2 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린 남미 주교회의는 공의회의 정신으로 남미 교회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교회는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함께 해야 한다고 주교회의는 선언했다. 이 같은 메델린 선언은 성직자와 신자들을 급격히 둘로 나누었다. 


로메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한 분개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1977년 3월 12일 친구이자 예수회 신부인 그란데 신부가 피살되기 전까지는 어쨌든 보수적이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메를린 선언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비판을 하곤 했다. 행동이나 생각에서 모두 보수적이었는데, 특히 전임 루이스 차베스 대주교와 비교해서 그랬다. 농민 등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지원한 진보적인 차베스 대주교는 75세로 은퇴하게 됐고, 그 후임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바티칸은 로메로를 선임했다. 정부와 군부, 그리고 부유한 자들은 그를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정통적인 보수라면서 환영했다. 반면 개혁적인 성직자들은 대주교 선임 축하 미사에 참석하고 않고 따로 미사를 드릴 정도로 실망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당시에는 후일 그가 보여준 변화의 폭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보수층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대주교가 된 로메로는 그러나 채 3주일도 못돼 그 기대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해방신학에는 찬성했지만, 마르크스적인 사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보내온 해방신학에 대한 책은 거의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교회의 해방은 물질적인 풍요나 정치 사회 경제 또는 문화적인 주도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들은 폭력을 지지하거나 폭력에 의해 지지되는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가 원한 건 좀 더 높은 차원의 근본적인 해방이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부자들의 교회와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교회만이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교회, 우리가 우리 마음을 다 바칠 그런 교회라고 강조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이 세상 모든 재화에게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그런 교회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순교자로 인정했다. 그를 제대에서 살해한 사람들은 제2 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충실한 교회를 쳐부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암살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잔혹하게 학살하는 불의에 직면에서는 결코 침묵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랑이 가득한 믿음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장례식이나 추모식 때 가장 많이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그의 신학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실제 그가 목숨을 바쳐가며 실천한 그의 신앙을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초기부터 보수적인 오프스 데이의 성십자가 사제회에 참여했다. 피살된 것도 오프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를 드리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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