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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눈발 날리는 시골 마을 쓸쓸한 하루 풍경
  • 전순란
  • 등록 2017-01-13 10: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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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2일 목요일, 흐리고 싸락눈


지리산에서는 트럭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들도 서울에서 보다는 훨씬 여유롭다. 방송을 하고도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고 아픈 다리를 끌며 문을 열고 길가로 나오기까지는 실로 ‘장구한 세월’이 걸린다. 서울처럼 스피커 방송을 하고 기다려 주지 않고 가버린다면 장사는 접어야 한다. 파는 물건도 그 계절에 맞는 게 대부분이다.


보스코가 “지금 저 아저씨가 뭘 판다는 소리야?” 묻는데, 내게도 경상도 말이라 정확하게는 안 들리지만 뭔가 “쏙 빠지고” 라는 소리와 절기를 봐서 간장 담글 소금을 팔면서 “간수가 싹 빠진 소금”이라는 거겠지 미뤄 짐작한다. 한 해가 지나고 장 담글 정월이 또 왔음을 소금장수 아저씨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알리는 소리다.



우리 문정마을 옆에는 ‘백연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건너다보면 누워계신 부처님, ‘와불(臥佛)’이 보인다 하여 동네는 ‘견불동(見佛洞)’이고 그래서 우리 동네 앞산은 ‘와불산’이다. 견불동에 오르려면 차가 뒤로 발딱 뒤집힐 듯 가팔라 나도 한두 번 올라가본 뒤 다시는 차로 갈 엄두가 안 나는 곳이다. 오르기 가파른 만큼 해가 잘 들어 장을 담가 파는 집이 여럿이었다. 처음엔 한집이었는데, 20여 년 전 어떤 스님이 들어와 생계수단으로 장을 담더니, 얼마 후에는 몸이 아파서 내려온 사람이 소일꺼리로 장독을 늘였다. 심지어 공장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지난번 걸어서 올라가 보니 이집 저집 장독만 늘어서 있고 마을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택배에 의지하는 판로마저 개척하지 못하면 그 무엇도 생업이 되지 못한다. 


요즘 시골 어디엘 가도 마을의 본디 모양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급주택이 불쑥 지어지고, 지어진지 2~3년도 안 돼 먼저 주인마님의 발길이 뜸해지고, 주인 남자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소리가 간혹 들리다, 오가던 사람 얼굴도 덜 보이면, 땅 사고 집짓고 하던 돈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마을회관에 돌곤 한다.



집주인이야 들인 돈의 절반도 안 된다고 엄살이지만, 터무니없이 크게 짓고, 널따란 잔디마당과 호화로운 정원을 만든 터여서 그런 큰 돈을 내고 사 들어오려는 사람은 여간해서 안 나타난다. 그 돈 있으면 자기가 땅 사서 자기가 집짓는다는 배짱들이기도 하고. 그렇게 몇 해 흐르면 지붕부터 내려앉고 마당에선 잡초가 주인 노릇을 하고, 창틈마다 담쟁이가 침투작전을 시작한다.


‘외지것들’과 대조되는 토박이 자손들이야 시골탈출에 겨우 성공하고 빠듯한 도시생활에 허덕이는 수준이어서 ‘혼자 사는 어머니’에게 조립식으로 한 댓 평 늘려드릴 경제력이 전부이고, 시골로 되돌아온다 해도 먹고 살 일도 막막하다. 무뚝뚝한 시라이댁이 유난히 살갑게 하더니 공소 옆 땅 80평 좀 팔아 달란다. 아들 장가를 보내려는데 내놓을 것이 그것밖에 없단다. 조상대대로 부치던 땅을 팔아야 결혼 밑천 마련하는 자녀라면 부모 봉양 능력은 더 없으리라.


그런 동네를 한 바퀴 다 돌고 빈손으로 돌아 내려가는 트럭의 뒷모습이 진눈깨비 속에 아른아른 이웃 마을로 사라져가지만 그곳이라고 소금 살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농촌이 늙어서 망가지고 나라 어느 곳도 성한 데가 없음이 한눈에 보이는데, 탄핵을 버티는 현정권의 무정부 상태 나라꼴이 지금 농촌과 다를 바 없다.



아래층집 전화 한 가닥이 우리집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집이 일하러 나가거나 외출을 하면 간혹 우리가 전화를 받아 준다. 오늘 아침 벨이 하도 오래 울리기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대뜸 “와 그리 전화 안 받아요?!”라며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여자. “여보세요, 내가 누군지나 먼저 물어보세요. 나도 객이에요” “주인은 전화도 안 받고 뭐 하요?”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데요?” “아로니아 값 좀 알아보려는데 대체 어딜 갔대요?” “그 사람도 여름내 고생하고 농한기 겨울에는 집을 비울 수도 있잖아요? 멀리 갔어요” 그러자 이말 저말 없이 전화를 탁 놔버린다. 날씨도 우울한데 그냥 값 좀 알아보겠다는 어투부터 시골사람들에게 ‘갑질’하는 도회지 소비자의 말투가 사람을 더 우울하게 한다. 모든 세상을 싹 덮어 버리게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으련만, 딴 데엔 대설 주의보가 내렸다는데....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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