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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새댁 사제’와 ‘미사 배합비’
  • 전순란
  • 등록 2017-01-16 10: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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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5일 일요일, 맑음


아침기도를 하다 내가 잠깐 딴데 정신이 팔렸던가 보다.(가톨릭에서 ‘분심(分心)’이라고 부른다) 보스코가 바로 잡아주며 수십 년 미사를 드리던 신부님도 간혹 깜빡하고 사도신경을 빠뜨리거나 면병 축성을 않고 넘어가는 일도 있더라고 일러준다. 80년대 로마 교민들이 성베드로기숙사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때 이야기.


갓 서품받은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는데 원로 장익 신부님(그때는 아직 주교님 아니셨다)과 함께 집전하느라 긴장했던지 ‘주의 기도’를 건너뛰었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교우들은 알아채고 깐깐하신 장신부님께 가엾은 ‘새댁 사제’가 깨질까봐 조마조마했다. 장신부님은 모르셨는지 봐주셨는지 별탈없이 넘어갔지만 그날 미사에선 새댁 무사하기를 비는 교우들 기도가 ‘주의 기도’보다 더 간절했었다.



수십 년 미사를 드리면 경문을 줄줄 외울 텐데도 신부님들은 왜 꼭 경본을 보면서 하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왔다. 이 ‘무식한 프로테스탄트’가 엉겁결에 해 준 설명. “내가 하찮은 쿠키를 수십 년 구워왔지만 구울 때마다 반드시 배합비를 다시 확인한다. 제과학교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배웠다. 조금 안답시고 배합비 노트를 우습게보다간 언젠가 실수를 한다. 그러니 성찬식처럼 거룩한 행사는 경문을 외고 제수를 차리는 배합비를 더욱 조심스럽게 챙겨야 할 게다” 내말이 그 구교우에게 먹혀들었는지 모르겠다. 


미사중 정작 배합하는 건 포도주에 물방울 떨어뜨리는 일뿐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이 이미 배합된데다 빵과 포도주 같은 물성(物性)까지 재배합되는 거창한 행사라는 게, 유식한 구교신자 보스코의 설명. 


휴천재 식당에 설치한 성탄구유를 보스코가 치우고 나는 거기 들여놓은 화분들과 5년 묵은 포인세티아들을 다듬어주었다. 성탄절을 꾸미는데 포인세티아만큼 싸고 아름다운 꽃이 없다. 어느 핸가 서울집에 사들여 성탄을 보내고 지리산으로 실어왔는데 물이 좋아선지 공기가 좋아선지 죽지를 않고 잘만 큰다. 


단지 지난 초겨울 좀 늦게 집안에 들였더니만 미리 추위를 타선지 잎이 모조리 시들어 버렸다. 그래도 정작 들어와서는 시든 잎을 떨어뜨리고 다시 생기를 찾아 휴천재 성탄을 빨갛게 장식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 가면서 벽난로 냄새 빠지라고 식당채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간 게 탈이어서 다시 냉해를 입어 잎을 다 늘어뜨리고 말았다. 오늘 시든 잎을 모조리 따고 붉은 꽃받침만 남겼더니만 보스코도 “잎 따고 나니 괜찮은 걸”하며 별 말이 없다. 겨울에 집안에 들이는 화분들은 모조리 내가 ‘데리고 들어온 새끼들’처럼 보스코에게 푸대접을 받는다.



참나무 말린 것만 때는 데도 삼사일 전부터 벽난로 연기 냄새가 유독 심했다. 진이엄마는 목 아파 죽겠단다. 난로를 놓은 지 3년인데 굴뚝청소를 한 번도 안했다는 생각이 났다. 서양에는 벽난로에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 그을음을 청소해주는 직업이 있다. 성탄절이면 산타할아버지가 빨간 옷에 흰 수염을 기르고서도 검댕 하나 안 묻히고 굴뚝을 드나들며 성탄선물을 택배하고, 바깥 지붕에는 루돌프가 끄는 썰매차도 파킹되어 있는 그림이 보이지만, 저 낭만의 벽난로가 나를 환장하게 만든다. 오늘도 내가 팔을 걷고 나서서 굴뚝 물받이를 빼내고, 작은 가위로 수평연통 안에 쌓인 검댕을 긁어낸 다음 국자를 넣어 박박 긁어냈다.


커피 타임에 내려온 보스코에게 벽난로 굴뚝 청소한 얘기를 했더니 벽난로 끄고 그냥 기름보일러나 돌리란다. 하루에 장작 여덟 개(3200원어치)면 13평을 이렇게 훈훈하게 데울 수 있는데... 남편은 단 한 번도 벽난로를 지피거나 불길을 다스리거나 나무를 넣은 적 없어 벽난로를 혼자 지피고 재를 치우고 사다리 놓고 올라가서 굴뚝청소를 하며 구시렁거리는 나를 보니 나도 산 속 여자 다 됐다.


저녁 7시 30분에 본당신부님이 공소에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신부님의 부드러운 집전과 온유한 강론이 신자들을 사로잡는다. 지난 가을 ‘부면장’ 강신택씨가 보스코의 적극 알선으로 대세받고 돌아가신 후 얼마 전부터 부인 임실댁이 함양성당 예비자교리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오늘 공소미사에 처음 나와 참 반가웠다. 이 공소로서는 실비아네 부부 이후 10여 년 만에 처음 나온 예비자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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