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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랑하는 이들과 어떤 손짓으로 작별할 것인가를…
  • 전순란
  • 등록 2017-01-18 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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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7일 화요일, 맑음 


지난 일요일 공소미사에 오신 본당신부님이 새해 덕담으로 ‘첫째, 감기 걸리지 말고 두번째, 골다공증 걸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이곳 본당에 온지 1년 안에 여덟 분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대부분 골다공증으로 넘어져 다친 다음 일어나지 못하고 합병증으로 죽음에 이르더란다. 빨리 돌아가시면 그나마 다행인데 ‘긴병에 효자 없다’고 다들 머리를 흔들 무렵에야 돌아가시니까, “아프면 불쌍하다고 생각해주는 게 아니더라. 질병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앗아가더라. 제발 아프지 말라” 하셨다.



내가 아는 어느 여인은 수술하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뒤 종이와 연필을 달라더니 제일 먼저 한 의사표시가 “남편 접견 금지!”였단다. 남편으로서는 그동안 내내 아프던 아내가 못마땅했겠지만 아내로서는 자기를 그렇게 병들게 한 것이 남편이라고 맘먹고 있었다면, ‘그 인간 꼴도 보기 싫다!’가 마취 후 정신이 깨어나면서 맨처음 떠오른 생각이었으리라. 남편이라는 남자가 두 글자로는 ‘웬수’, 네 글자로는 ‘평생 웬수’일 수 있다니....


내 페친 윤병훈 신부님이 오늘 올리신 글도 쿡 웃음을 자아낸다. 방학을 맞아 모처럼 멋을 내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아들! 화가 치민 아버지가 그 머리를 싹둑싹둑 자르겠다고 고함치더니 며칠 후 자기는 하얀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더란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당당하게! 


새로 나온 껌들! ‘남편껌’(‘웬수껌’)도 ‘아빠껌’(‘꼰대껌’)도 나옴직할 듯


나도 언젠가 고딩 있는 집에서 얼마 지낸 적 있었는데, 토요일에 일찍 들어온 고딩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친구들과 함께 나갔다 아버지가 돌아오기 30분전에 귀가해서는 본래 머리색으로 다시 염색을 했다. 매주 토요일 그 집 풍경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바로 오늘 남편에게 흰색 종이에다 ‘접근 금지’의 옐로우 카드를 내민 여인이다.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가 되는데 왜 아버지가 돼서는 자기가 아이였던 시절을 잊어버릴까? 엄마들도 다를 바 없지만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다.


혼수상태에 있는 남편이 걱정돼 친구가 아침 일찍 전화를 했다. 오늘 의사가 기어코 환자의 목에 구명을 뚫는다는데, 그걸 뚫고 나면 빼지를 못한다 하고, 남편은 평소에 절대 그런 조처를 원치 않는다고 각서까지 썼는데, 의사도 두 아들도 막무가내란다. 아는 신부님이 문병오셔서 ‘뇌세포도 다 죽어 코마 상태이고, 신장 투석을 네 시간마다 해야 하니까 환자 본인에게도 보호자에게도 못할 짓이다’면서 설득하는데도 아들이 듣질 않는단다. 내게 전화를 바꿔준 엄마를 대신하여 내 생각을 큰 아들에게 전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내가 원하지 않는 형태로 다가오는 현실은 그냥 사고일 뿐일까? 투명한 하늘, 빛나는 해, 아름다운 꽃, 뺨을 스치는 봄밤의 싱그러운 실바람, 베어 눕힌 볏단을 조용히 쓰다듬는 빗소리, 넘어가는 황혼에 얼비치는 산 그림자, 내 귀여운 손주들 웃음소리, 그 많은 사랑스러운 것에 기꺼이 반응할 수 없다면, 사랑과 행복, 심지어 슬픔과 분노까지 나를 떠나 버렸을 때라면, 나는 내 몸에 너덜대며 달려있는 투명의 호스들을 모조리 뜯어 버리겠다.



그집 아들을 내가 설득하지 못한 부분은 고맙게도 전문의이신 김경일 선생님이 자상하고 다정하게 설명해 주셔서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 같다. ‘당뇨합병증으로 신장투석하며 고생하던 환자가 그 정도라면 참 착하게 사신 분 같다’는 말에 내 친구는 큰 위로를 받았단다. 어제 먼 외국에서 당도하여 심하게 반발하던 작은아들을 끌어안고 한참 울었다니 절망 속에 아들도 아내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오랫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해왔으니 남편이 살던 집, 늘 잠들던 익숙한 침대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남편을 떠나보내리라.


우울한 오후 내내 쿠키를 구우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대로 죽어 갑니다’는 김경일 선생님 말씀을,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를, 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을 어떻게 마감질할 것인가를, 사랑하는 이들과 어떤 손짓으로 작별할 것인가를, 남은 날이 적기에....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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