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나 졸지에 과부 됐잖아, 과부는 성경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 전순란
  • 등록 2017-01-25 10:23:49

기사수정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맑음


지리산 속에 있는 동네 중 우리 문정마을은 ‘서울 압구정동’이라 불린다. 유림에서 마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곳처럼 완만한 비탈에 널따란 골짜기가 없어 산동네답지 않게 예부터 문정리(文正里)라는 점잖은 이름까지 붙어 있다. 함양읍에서 30분마다,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군내버스가 지나다니는 교통의 요지다. 양지바른 곳이어서 요즘처럼 눈이 와도 금방 녹아 길이 빙판을 이루지도 않는다. 그 대신 문상마을 위의 도정마을만 하더라도 버스는 하루 두 번 11시와 5시에 올라오고, 눈만 오면 당산나무 옆 대나무밭길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야 한다.


오늘 스.선생댁에 ‘과메기 점심’을 하러가면서도 내 차를 주차시키다 바퀴가 확 도는 바람에 체칠리아씨 새 차를 박을 뻔해서 ‘나도 적막강산 설국(雪國)에 갇혀 살고 싶다’던 시적 언어구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식은땀에 싹 가셔버렸다.



그래도 스.선생댁 ‘솔바우촌’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는 가야산까지 미치는 동편의 산자락이며 휴천강이 흐르는 굽이굽이며 군데군데 강가로 열리는 마을 풍경들이, 귀촌한 사람들이 교통상의 온갖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높다란 산비탈에 둥지를 마련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체칠리아씨와는 거의 두 달만의 상면이다. 큰딸네 아이들 봐주러 한 달 넘게 도회지에 가 있었고 나도 큰아들네가 3년만에 귀국한 터라 연말연시를 서울에 가 있어서 두 부부들이 얼굴 잊겠다는 게 오늘 오찬 모임의 명분이다. 소담정 도미니카도 함께 갔다. 산 속에 살면서 시시때때 밥상머리에 함께 앉는 지인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집 달아짓기’의 명수인 스.선생님은 오늘도 공사중! 마당에 줄줄이 덧달아지은 집 한 채는 어느 젊은 도사(말도 않고 이 엄동설한에 불도 안 때고 밥은 반찬 없이 고추장에 비벼먹으면서 참선을 하느라 도무지 방에서 안 나온다는)에게 반년 월세를 놓았고, 그 다음은 당신네 부부가 곧잘 잠을 자는 황토방이고, 세 번째 저온창고를 개조하여 방을 들이는 중이었다. 그 집들 뒤로 찻길을 내서 감동까지 차가 들어가게 만드는 봄 공사를 이미 기획 중! 이 산 속에 살면서 집짓는 놀이와 나무 베어 끌어다 장작을 패는 놀이로, 간간이 도회지 친구들을 불러 한 잔 나누는 재미로 벌써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으니 스.선생도 도사라면 도사다.


서울 가는 길 덕유산 설경 


40년 가까이 알고 지내던 아오스딩씨한테 고별을 하러 1시 30분 문정리를 떠났다, 고려대구로병원 장례예식장으로 가는길. ‘김기사’ 내비의 도움으로 화성에 도착하는 5시 30분까지는 무사히 달렸는데 목적지가 지척인 나머지 23km를 가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지긋지긋한 서울의 트래픽을 어떻게 견디고들 사는지! 문정리에서 함양읍까지 한 번도 차가 서는 일 없고 때로는 차 한 대도 안 만나는 지리산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상주 형욱이와 형래가 의젓한 40대 가장들로 문상객을 맞고, 데레사씨가 편안한 표정으로 남편을 보내드리는 얼굴이 나를 안심시켰다. 내 문상 인사에 “아 뭐야? 그러고 보니 나 졸지에 과부 됐잖아, 과부와 고아는 성경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라는 농담으로 답한다. 앞으로 몇 달을 두고, 아니 최소한 2, 3년을 두고 새록새록 떠난 이의 생각에 눈물짓고 원망도 하고 허전한 옆구리에 사시사철 찬바람이 불겠지만 당장은 저 여유로움이 문상객들을 안심시킨다.


“나 졸지에 과부 됐잖아?”


저녁 8시 30분에 수원 화성 순교성지의 나신부님이 오셔서 빈소에서 미사를 올려주셨다. (오후에는 고인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김영배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드려주셨단다) 고인에 대한 따스한 추억들이 오가는 자리였다. 살레시오 협력자회 출신이고, 아모레에 근무하다 도신부님의 권유로 신학교에 가셨고, 11년째 성지관리를 하고 계시면서 ‘잡초(雜草)의 잡권(雜權)’에 대한 영성적 고찰을 깊이하시는 나신부님의 시선이 청소년 중에서도 잡초에 해당하거나 ‘봄에 지는 낙엽’에 가까운 젊은이들에게 혼신을 다하는 살레시안의 정신 그대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축일’이어서 우리 손주 시우의 영명축일이다. 일기를 쓰다 아범에게 축하 문자를 보냈다. 벽시계는 새벽 두시!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