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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앞집 처마 고드름이 어느새 녹듯 우리 삶도 방울져 녹아내리는데
  • 전순란
  • 등록 2017-01-27 10: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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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6일 목요일, 맑음


데레사씨가 어제 남편 장례는 잘 모셨는지, 선영인 주문진에 유골을 모시고 돌아와 어려움은 없는지 걱정 돼 전화를 했더니 생각보다 더 목소리가 밝고 씩씩해서 안심이 된다. 처음엔 병원비와 장례비용이 걱정스러워 자기네 전 재산인 그 작은 연립주택이라도 팔아야 되는 건 아닌가 염려했는데 아오스딩이 떠나면서도 병원비와 장례비를 고맙게도 딱 맞추어 해결해 주고 떠났단다. 결혼식 부주도 중요하지만 장례식 부주는 슬픔 더불어 경제적 중압감에 놓인 유족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본 셈이다. 


그동안 이뤄졌던 모든 일을 되짚어 내게 얘기해 주면서 마지막 떠나기 전날 남편의 귀에 대고 그동안 미안했던 일, 사랑했던 일, 고마웠던 일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더니, 의사 말대로는 뇌세포가 다 죽었다던 사람이 씨익 웃더란다. 돌아가고 나서도 염을 하는 봉사자가 아직도 귀는 열려있으니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권하더란다. 살아 있을 때 그 긴 시간 동안 하고 싶던 말 꼭 해야 했던 말을 못다 한 사람은 그 때에 가서야 바빠진다. 아니, 평상시에 서로 많은 대화를 했던 사이라면 아직도 할 말이 더 있겠지만, 평소 소 닭 보듯 하던 사이라면 소가 닭 보내듯 ‘퍼드득’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고드름처럼 녹아내리는 아름다움이라니...



이렇게 또 한 사람이 떠났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사람이 죽어도 별로 슬프지 않다. 오랜 병상에 있던 분과 치매로 주변을 힘들게 하던 사람이 떠나면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앞집 처마의 고드름이 어느새 녹아내렸나 하듯이 우리의 삶도 방울져 녹지만 투명하게 아름답지 않은가? 물론 젊은이의 죽음이나 남은이의 현실이 안타까운 경우는 다르지만... 


지난 12월엔 빵기네가 오면서 평소 연말연시에 해오던 여러 행사가 취소됐다. 우리 집 집사들의 홈커밍데이, 보스코의 친구초청 모임, 원로사제 초대 모임, 시인들의 모임 등등. 내가 꾀를 많이 부린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해(음력)가 가기 전에 보스코 친구이자 대자인 종수씨라도 만나기로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는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여권을 갱신하느라 도봉구청에 들렀다. 서울 살 때는 많은 민원으로, 시민활동으로 자주도 드나들던 곳인데도 주민등록을 지리산으로 옮기고 나서는 오는 것 자체가 서먹하다(김말남과 전순란이 조용하면 도봉구가 조용하더라는 공무원들 한탄도 있었다). 


재임하면서도 동네 여자들의 입방아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동진 구청장님이 별 탈 없이 잘 하나 보다. 민주당원인 구청장에게 뭔가 못 마땅한 일이 생기면 말남씨는 즉시 나에게 항의를 하곤 하는데 마치 내가 그를 공천한 민주당 시당위원장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하지만 별 말이 없으니 되레 심심하기도 하다.


1시가 넘어 종수씨네 도착하니 반갑게 맞는다. 보스코가 주례해준 그 집 아들한테서 태어난 손주 예건이(10살)가 방학이어서 할아버지 댁에 와 효도중이다. 언제나처럼 우선 엄마는 맛나고 정성스레 식사를 준비하기에 어떤 식당음식보다 맛있다. 종수씨네가 천안에 살 적에는 보스코가 대전 지역에서 강연할 적마다 자주 들러 자고 먹고를 했었다. 


유리씨가 꼬마 탤런트인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제 초딩인데도 장경이는 처녀티가 난다. 보스코의 제자로 해마다 설빔, 추석빔을 보내주는 고마운 사람이며 외동딸의 매니저로 분주한 나날을 보낼 게다. 모녀가 미인이니 유리씨 모친도 상당한 미인일 게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집에 돌아오니까 엽이의 약혼녀 미현씨가 보낸 커다란 꽃 화분이 기다리고 있다. 다정한 사람들이 헤어지고 우리의 젊음이 가고 아름다운 꽃이 시들지라도 너무 서러워하지는 않으련다. 늙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남아 있음이니 우리 대모님 말씀마따나 삼감(三感: 감탄, 감격, 감사)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삶이 고맙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세월을 찾으소서...” 워즈워드의 시구(「초원의 빛」)가 새삼스러운 음력 세밑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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