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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그 집에 일 년에 한 번 불을 켠다”
  • 전순란
  • 등록 2017-01-30 11: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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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9일 일요일, 눈


눈이 내린다. 뒷산 언덕에 하얀 목련이 마구마구 피어났다 속절없이 진다. 그해 봄 원자력병원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봉수엄니는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반짝이던 눈은 더 빛났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이승의 아름다움을 모두 빨아들일 듯 지영이와 큰딸 그리고 나와 함께 언덕에 올라서서 우리 집에 양껏 피어난 목련을 보며 ‘목련화’를 부르고 목련을 노래하는 시도 읊었다. 환갑을 막 지낸 나이였으니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었는데... 하얀 목련처럼 만개했다가 처참하게 스러지던 생명은 한 순간이었다.


노동운동을 했다던 그니의 남자는 거친 듯 했지만 밤송이 안에 순한 밤알처럼 따뜻하고 달큼한 사람이었다. 딸 둘 아들 둘, 엄마를 닮아 모두들 순하고 꿈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아침 성당을 가다 그 가족이 살다가 떠난 그 집 담밖에 발길이 멈춰 지난 시간을 더듬는다.



그 집에 일 년에 한 번 불을 켠다.

사람들은 먼지가 쌓여 어둠이 접수해버린 그 집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목련꽃이 피어있는 동안만 신기하게 쳐다본다. (최기순, 「목련나무」)


까맣게 잊었다가도 눈이라도 내리면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그 집 두 아이 지영이와 봉수의 결혼식 주례를 보스코가 하면서 이어진 인연이라 언제라도 눈 감으면 과거가 지금인양 되살아온다. 그러니까 딱 오늘, 명절 다음날. 늦은 아침 시간인데도 굴 넣은 무나물과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가 섞여있던 접시 그리고 탕국! 아침을 먹고 왔다 해도 밥 위에 생선을 발라 올려주며 ‘어여 먹으라’고 재촉하던 그 다정했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해 봄이 다 지나기 전 그니는 세상을 떴고 그 가족도 그 집에서 더는 못 보게 되고서도 나는 자주 그 집 앞을 지나며 서성였다, 너무 그리워, 너무 보고 싶어서...


큰아들 봉훈이가 사십을 겨우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던 날도 걔가 창밖으로 내다보던 창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세월은 가고 묻혔던 기억 속에 가끔 펄럭이며 속내를 보이는 추억도 그렇게 흐르며 잊혀져간다. 제각기 자기 삶을 꾸리느라 바쁘다 보니 그 집 앞을 지날 적에야 한 번씩 추억의 꽃등을 켜는 셈이다, 그것도 잠시. 


9시 미사에 오던 꼬마들은 다 어딜 갔나? 부모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 계시는 시골들 갔겠지. ‘율동찬미’마저도 선생님들이 하고, 맨 앞에서 말썽 피우던 꼬마들이 안 보이니 몹시 서운하다. 작은 수녀님이 종신허원 준비하러 본원으로 간다는 인사. 그니의 건강이 안쓰러웠는지 보스코가 ‘고백록’ 한 권을 보내며 격려하였다. 



미사 복음에서 ‘진복팔단’을 꼽아주시던 주님 말씀을 음력 초이튿날 들으니 올 한 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인다. 부디 올 한해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돈이 우선’이란 생각을 접었으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호천이가 오늘 엄마를 모시고 엄마가 세우신 일산교회를 갔더란다. 아직도 엄마를 기억하는 많은 교인들을 향해 여유 있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씨익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국가 원수 급의 기품이더라나. 아직도 엄마 연세에 자존심과 우월감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우리 막내 전호연 장로는 써간 기도를 제법 잘 읽어 내려갔고, 막내가 대예배에서 제단 위에 서서 회중기도를 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 줌으로써 최고의 효도를 한 셈이다. 아마 걔가 받은 축복이라면 욕심 안 부리고 주어진 상황에 주어진 만큼 만족하는 소탈한 성품이리라. 그의 두 아들 역시 공부를 좀 못해도 저 할 만큼 하게 용기와 격려들 해줘서 하나는 제대하자마자 취직하고 하나는 직업군인으로 입대하여 잘산다. 순탄한 성격과 소박한 꿈이 곧 순탄한 운명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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