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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꽃 피는 얼굴이 좋다면 우리 겨울 침묵을 가질 일이다”
  • 전순란
  • 등록 2017-02-06 10: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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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5일 일요일, 종일 보슬비

 

어제 밤에 주무신 손님이 새벽바람에 떠나버리고 빈 방엔 뎅그러니 베개 둘만 간밤 손님을 기억하고 있다. 2년 전 보스코가 안동으로 강연을 하러 갔을 때였다. 호텔에서 잘지 고택이 좋을지 선택하라는 주최측의 연락이 왔기에 나는 서양식 고택을 생각하고 그쪽을 택했다. 그러나 내 상상이 별로 신통치 못했다는 걸 파악하는 데는 숙소에 가서 오래 안 걸렸다. 주어진 침구라곤 목침에 가까운 나무 베개, 담요 두께의 홑이불, 요 대신 얇은 패딩 하나가 전부였다. 깔자니 위가 춥고 덮자니 허리가 배기고 이 긴 밤을 어찌 넘기나 갑갑했었다. 낮에 양반골을 어슬렁거리던 외국인들이 있던데 그들에게도 똑같은 잠자리가 주어졌다면 서양 매트리스침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국 고택의 낭만적인 밤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라고들 했으리라.

 


어젯밤 우리 손님은 추위에 너무 떨고 들어왔기에 방바닥을 바글바글 끓도록 따습게 해드렸으니 뭐야, 이참에 우릴 통구이 하려나 봐!”라며 새벽도주했을까? 보스코 말이 새벽 세시 좀 넘어 도정으로 올라가는 차 소리가 들리더란다. ‘슬한재가 심야전기로 엔간히 덥혀졌을 시각이리라.

 

아침 공소예절에도 소박한 숫자가 주님께 예배를 올렸다. 마을은 보슬비 머금은 아침 안개에 늦잠을 자고 있고 와불산도 살로메의 일곱 너울 춤을 추듯 아침내 보일듯말듯 자태를 뽐낸다. 산세는 사시사철 하루 종일 언제라도 보기 좋다. 하느님만의 예술이다.

 


오후에 마을회관엘 갔다. 2시가 넘었는데도 아짐들이 찬이 겁나 좋으니 챙겨 줄 게 한술뜨라고들 하신다. 어제가 이장네 제사였고 제사 음식을 죄다 싸왔다나. 방바닥엔 셈베 과자, 뻥튀기, 찰떡, 밀감, 사과가 가득하다. “먹을 게 많네요자손들이 돌아가며 즈그 엄니들 겨우내 지겨울까 간간이 다과를 댄다니 효손들이다.

 

여든 중반이 넘은 엄니들은 흐릿한 시선으로 그저 TV만 껌뻑거리며 쳐다보고, 그래도 총기가 남은 세대 곧 칠십대 중반들은 치매 퇴치를 위해열심히 동양화 48폭을 감상하고 있다. 3점에 100원 인데도 돈이 솔차니나간단다. 맨날 같은 사람끼리 노니까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겨 갈 뿐 동네밖으로 나가는 외화유출은 절대 없단다. 경제 자립의 주체로서 지방자치가 확실한 장소다. 내 나이또래의 '젊은것들' 은 서넛도 안되지만 겨우내 마을회관의 공동식사 시중을 들어야 한다.

 

느닷없이 안사람들 방문을 쓰윽 열고 남정 하나가 들어온다. 아짐들은 나한테 했듯 이번엔 아저씨 앞으로 먹을 것을 죄다 밀어준다. ‘이 사람은 또 누구야?’ 궁금해 하니 소금장수라고 일러준다. 시골도 장 담그는 사람이 없으니 소금 사는 사람도 없어 저 소금장수는 뭘 먹고 살까? 겨우내 이 마을 저 마을 노인정을 찾아다니면 자기 한 입은 풀칠하겠지만... 시골에선 아직도 상 봐 놓은 밥상머리에 손님이 들이닥치면 손님이 늘 상석이다.

 


빗소리에 놀란 매화송이가 화들짝 눈들을 뜬다. 어제가 입춘(立春)이었으니 땅 속까지 봄비 소식 전해지는데 얼마 안 걸린다. 겨을가뭄이 심해 올해 양파는 모종이 누렇게 몸살을 하고 있어 우리 텃밭 양파농사도 조짐이 안 좋다. 작게 난 아이도 후에 크게 키울 수 있듯이 어느 날 불쑥 자라 이 안주인을 놀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식당채 앞 화분에 심은 바늘꽃과 체리 세이지에 물을 줬다. 우물가 수도꼭지가 얼지 않았는지, 얼었다 녹았는지 물이 콸콸 나오기에 입춘 물이다. 물마시고 기운차려라!” 하며 듬뿍 주었다. 긴 겨울의 침묵이 있었기에 봄기운이 값진 오후 한나절이다.

 

따뜻한 사람이 좋다면

우리 겨울 마음을 가질 일이다

 

꽃 피는 얼굴이 좋다면

우리 겨울 침묵을 가질 일이다

 

우리 희망은, 긴 겨울 추위에 얼면서

얼어붙은 심장에 뜨거운 피가 돌고

얼어붙은 뿌리에 푸른 불길이 살아나는 것... (박노해, 「겨울날의 희망」에서)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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