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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짧았던 사랑일수록 치열하게 다퉜거늘’
  • 전순란
  • 등록 2017-02-10 09: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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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8일 수요일, 흐림


졸업시즌이라 젊은 엄마를 겸하는 아우들이 대부분 못 와 넷이서 단출한 느티나무독서회 모임을 가졌다. 오늘 읽은 책은 마음산책에서 나온 이기호작가의 콩트로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책. 처음엔 책이 너무 가볍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작가의 책을 읽었던 회원들이 작가의 진솔한 삶의 자세가 좋다 하여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짧은글 우습다고 쉽사리 덤볐다가

편두통 위장장애 골고루 앓았다네

짧았던 사랑일수록 치열하게 다퉜거늘 (작가 이기호씨의 변)



요즘 얼마 동안 ‘조류독감’이 발생하여 가금류 살처분으로 전국이 시끄러웠는데, 이젠 매해 계절처럼 찾아오는 ‘구제역’으로 소 500만 마리를 키우는 축산농가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작가는 “타인 바이러스”라는 콩트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항로가 없어 두바이를 경유하였다. 한국에서 한참 맹위를 떨치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에 오금이 절여 두바이에 머무는 3시간 동안 손을 네 번 씻고 두 번 양치질을 하고 물티슈로 의자까지 꼼꼼히 닦는 소란을 떨었다. 


그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옆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심상치 않았다. 연신 끙끙거리고 잔기침을 하는 등 아픈 모습이 역력했다. 옆 사람과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중동’에서 30년을 살았다는 얘기! ‘중동’에다 ‘기침’에다 ‘신열’로 끙끙거리는 할머니라니! ‘아,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스튜어디스에게 자리를 바꿔달라며 저 할머니 메르스가 틀림없다 확신했는데 스튜어디스의 질문에 할머니가 하던 대꾸. “맞아! 어찌 알았대? 나 30년 살았어, ‘부천시 중동’에!” 마녀사냥식의 진단을 두고 작가가 일침을 가하는, 인간들의 선입견과 오류!


AI로 얼마나 멀쩡한 닭과 오리 새 3500만 마리가 병 걸린 동료 닭, 병든 오리와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산 채로 매몰되었다. 이제는 순한 눈을 껌벅이는 그 큰 덩치의 소와 젖소, 돼지가 얼마나 억울하게 살처분 당할까? 그 짐승들은 “중동의 그 중동이 아니고 부천의 중동이란 말예요” 라는 말도 못하고 포클래인이 퍼 넘기는 흙더미에 깔려 묻혀서 세상을 하직해야 하다니! 



오늘의 책을 읽고 미얀마 여행에서 막 돌아온 연수씨는 우리 주변에 내가 놓쳤던 흔한 이야기로 ‘눈은 웃지만 맘으론 울게 하는’ 책, 부드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 했다. 삶이라는 게 그리 꿈같지 않더란다. 귀농해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꿈을 안고 내려온 농촌의 생활은 결코 녹녹치 않더란다. 소설에 그려진, 미처 시작도 못한 채로 좌절하는 인생들의 웃기면서도 슬픈 삶, 앞이 안 보이는 내일도 그만큼 아플 듯싶은 책이라 평했다.


차자씨는 응급실에 실려와 차례에 밀려 애처롭게 보채는 아기와 부모더러 ‘소용없으니 기다리라’는 옆사람의 한마디, 그리고 그니의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건네는 한 마디가 기억에 남았나 보다. “엄마, 그 아줌마한테 소용없다는 그런 말 하지 마. 애가 듣잖아? 그럼 기운 빠지잖아?” 자신도 평소에 아들에게 ‘소용없다’는 말마디로 기를 꺾던 생각이 씁쓸하단다. 미혜씨는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치킨배달부에게 승강기를 못 타게 하는 몰인정한 아파트 주민들과 수위들 얘기에서, ‘이기적인 사고는 DNA 문제가 아니라 오랜 자본 중심의 사회적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악덕’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또한 ‘악마의 얼굴을 한 돈’의 횡포다.



오늘 점심엔 청학동 사시는 오마리아 교수님(AFI) 초대로 단성에 가서 식사를 했다. 교수님댁 이웃에 사시는, 그래서 주일마다 미사를 드려주시는 은퇴사제 강신부님의 생일축하 자리기도 하단다. 


식사후 청학동 강신부님 댁으로 가서 더치커피를 대접받았다. 신부님이 목수로서(‘목수인 스승의 제자로 살아오신 분’답게) 손수 짓고 달아내신 집에서, 혼자서 살림하며 살아가시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봉재 언니와 오교수님, 이웃의 수산나 선생님과 또 손님으로 온 젬마씨까지 시골생활의 단출하고 자족한 행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속수도자로 한평생 살아온 수산나 선생님은 당신 평생 잘한 일 두 가지가 예수님께 삶을 건 선택이 하나요, 하나는 그 인생 늘그막에 지리산으로 들어온 선택이었단다! 마산공단에서 젊은 여자근로자들을 지켜주느라 일평생 ‘치열하게 다퉈온 삶’을 이제 대자연으로 그분에게 갚아주는 이 넉넉함과 자족감이라니! 


봉재 언니는 블라지미르 메그레 작 「아나스타시아」를 읽고 있는데 러시아 오지 타이가에서 남을 돕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사는 한 여인의 얘기라며 귀농한 사람이라면 꼭 읽어 볼만한 책이라 추천했다. 오늘 주변의 귀농인들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연수씨에게도 그들과 함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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