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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살아남은 생명은 아름답다!’
  • 전순란
  • 등록 2017-02-17 10: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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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5일 수요일, 맑음


세상이 하도 어수선 하니 손에 일도 잡히지 않고 마음도 떠 있다. 내 속이라도 아는지 작년 같으면 한참 싹을 올렸을 겨울초(유채)와 시금치, 꽃풀로는 수레국화와 들양귀비도 ‘싹수가 없다’! 어쩌다 명이긴 씨앗들은 힘들게 싹을 틔우긴 했지만 춘궁기의 극성맞은 물까치떼에 떡잎 하나도 안 남아난다. 곡식 낟알과 열매가 없으면 새들은 꽃눈과 새싹을 쪼아 먹는다. 그래서 아예 가을 파종을 접었다.


그래도 속이 안 차 뽑지 않고 남겨 둔 배추는 태양을 안으려 펑퍼짐한 ‘봄뜸’이 되었고, 뿌리가 시원치 않아 뽑기도 귀찮아 놓아둔 비트는 얼었다 녹았다 하며 기나긴 겨울을 지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날이 풀려야 알겠다. 명이 제일 질긴 것으로 치자면 파슬리와 루콜라인데 작년에 씨를 받아 집안 곳곳에 뿌렸더니만 겨울 추위에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생명은 아름답다. 산다는 건 저런 고통과 추위에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생명, 새와 산짐승의 겨울 허기에 살아남은 생명은 아름답다.


겨울을 난 봄뜸


루콜라


파슬리


빵기가 ‘어무이의 뛰어난 예지력’을 칭송해 왔다. 내가 40여 년 전 빵기와 빵고에게 붙여준 이름이 2017년에 ‘탑 이름 다섯’에 당첨되었단다. 빵고의 이름 ‘하윤’은 탑 2위고, 빵기의 이름 ‘하은’은 탑 4위더란다. 그런데 둘 다 여자아이를 둔 부모가 선호하는 이름이라나? 작명가들이 나한테 곧잘 시비를 거는 대로 한자로 쓰면, 빵기의 ‘하은(賀恩)’도, 빵고의 ‘하윤(賀允)’도 등수에 들 리 없다. 우리 작은 손주 ‘시우’도 선호하는 남자 아이 이름 3위에 올랐단다. 한자 ‘시우(始宇)’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우리 큰 손주 ‘시아(始峨)’만 등수에 못 들어 불쌍하다. 둘의 이름은 걔들 외할아버지께서 작명하신 것이다.


그래도 제네바 ‘한글학교’ 종업식에서 시아가 특별상으로 다독상(多讀償)을 받았다고, 시우는 스키 방학을 맞아 열심히 한글을 배우고 있다니, 우리 며느리 참 기특하다. 지난 연말 왔을 때도 매일 쇼핑을 가기는 하는데 사들이는 거라고는 늘 헌책뿐이었다! 돌아갈 적의 그 많은 짐도 애들 책으로 200여권을 싸갔다. 35년 전 우리가 이사 다닐 적의 짐도 대부분 책이었는데... ‘책은 사람이 만들고 그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을 이번에 다녀간 두 손주에게서 실감하였다. 그래선지 사부인은 우리를 ‘학자 집안’이라 추켜세우신다.



남해 파스칼 형부가 요즘 피조개가 제철이라며 조개를 보냈기에 진이네, 우리, 마을회관 세 몫으로 나누었다. 마을회관에 피조개를 가져다 드리며 “곧 봄인데 밭에는 뭘 심을까요?” 물으니 모든 할메가 “감자!”라고 합창한다. 할메들은 계절도 단체로 맞고 파종도 단체로 한다. “그런데 감자 종자는 어떻게 구하죠?” 물으니 “작년 가을에 신청하고 다 나눠 가졌잖수?”


나도 씨감자를 신청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 우리 것은? ‘상주처녀’ 도메니카와 나누기로 했다는 생각에 그 집 가서 혹시 씨감자 받아 두었나 물었더니 없단다. 아래층 진이엄마한테도 나 없는 새에 씨감자 받아놨나 물었지만 그런 일 없단다. “이상하다?”


근엄하신 이장님께 전화하기는 참 안 내키지만(경상도에선 여편네가 남정네한테 전화하기는 참 힘들다) 감자파종 대열의 낙오자가 될 수는 없어 전화를 했다. “지난번 나도 감자 신청한 듯한데 내 감자는 어찌 됐나요?” 내 딴엔 (우리 보스코에겐 거의 안 쓰는 어조로) 공손하고 조심스레 물었는데 대뜸 “허따, 정신 차려요! 내가 집 문앞까지 갖다주고 돈꺼정 받아 왔는데 뭔 말이라요!" "아, 예, 예!" 정신을 차리자! 바짝 차리자!


하지만 감동과 창고를 다 뒤지며 “그 감자가 어디 갔담?”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을 하다 얼지 않고 싹이 나지 않을 장소를 더듬어보니 “심야전기 보일러실!” 어디, 가 보자! 바로 그 곳에서 감자는 박스 안에 얌전히 겨울을 나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헷갈리는 나를 보고 깔깔거리며 좋아하는 두 사람, 내 남편 보스코와 이웃의 ‘상주처녀’ 도메니카! 이 둘은 아군일까, 적군일까? 그래도 씨감자 둔 곳을 생각해 냈으니 치매는 아니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산자락에 봄기운이 돈다


배나무 가지가 봄빛으로 물들면 양파도 기운이 나고 텃밭엔 감자를 심어야 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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