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 주교황청 전 한국대사의 '선거 영성'에 대한 칼럼을 총 4편으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 편집자주
정치는 ‘진흙탕 싸움’인가? 최고의 이웃사랑인가?
작년에 시작한 대통령 탄핵정국을 두고 가톨릭신자들의 입장도 갖가지였다. 대부분은 ‘최순실 국정농단’에 분개하여 광화문 시위 현장이나 지역의 기도회에 나가면서 ‘특검’의 활동이나 < jtbc 뉴스룸 >을 지켜보았다.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정치라는 것은 어차피 진흙탕의 개판 싸움’이라고, ‘이 사람이 하던 저 사람이 하던 마찬가지!’라고 냉소하는 교우들도 있었다.
과연 정치는 ‘진흙탕의 개판싸움’이고 정치에서 멀찌감치 서 있는 게 신앙인의 자세일까? 정치는 내 알아서 할 테니 교회는 ‘속 시끄럽게 말고’ 사제는 맘 편한 얘기만 해야 할까? 혹시 하느님께서 내 정치적 견해와 발언과 투표행위를 내 영원한 구원과 결부시키지 않으실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하게 답변을 준다.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라고 하였다(복음의 기쁨 205). 그 이유는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라고도 하였다.
‘사회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
지금부터 1,7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인류 역사를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갈라서 보았다. 가톨릭신자를 자처하는 종교인이 어느 도성에 속하는지 판별하는 기준도 제시하였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 단지 하느님의 도성에 속하는 이들은 ‘사회적 사랑’을 살고, 지상의 도성에 갇힌 자들은 ‘사사로운 사랑’을 산다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다.
쉽게 말해서, ‘팔이 안으로 굽는 마음’은 ‘사사로운 사랑’이어서 그것만으로는 구원의 범위에 들지 못한다. 팔을 밖으로, 피붙이 밖으로, 사회의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38선 너머의 동포들에게까지 미치는 마음은 ‘사회적 사랑’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교황은 ‘사회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정치적 사랑’이라고 명명하였다.
내 주먹에 쥔 것을 지키는 데 급급하고, 맹목적 지역감정으로 투표하고, 내가 뽑은 대통령이 무슨 불의한 짓을 해도 다 변명해주는 짓은 지독히 사사로운 사랑이어서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가르침이다.
국가는 당구공이 아니고 다면체다
국가 사회에 대한 교회의 “모델은 구체(球體)가 아닙니다. 구체는 모든 점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으며 그 점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모델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거기에는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열망, 그들의 잠재력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236항) 자유와 평등, 민주와 통일을 얘기하면 그가 성직자든 교우든 가리지 않고 ‘종북좌빨’이라 손가락질 한다면 그는 기득권 곧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이지 십자가를 받드는 신앙인이 아니라는 교황의 엄한 가르침이다.
그러면서 교황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결정할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러 가는 가톨릭신자들에게 한 가지만 주문한다.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185항) 이 사회의 약자들이 정리해고로, 비정규직으로, ‘N포 세대’의 절망하는 젊은이들이 사회의 폐품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선거철이 왔다, 그것도 갑자기! 성당 제단이나 집에 걸어놓은 십자가를 바라볼 적마다 굵은 통나무에 못질을 당한 그리스도의 팔에 시선이 간다. 그래서 투표지를 들고 기표소의 휘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신앙인의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거기서 내가 기표하는 순간, 내 손아귀에 쥔 변변치 않은 것을 지키겠다는 욕심 하나로 온갖 억지와 거짓말과 증오를 서슴지 않는 내 본심을 하느님께 들킬까 두렵다. 그 투표지가 내 영원한 구원을 좌우하리라는 믿음을 신앙인은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