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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상관없어! 쫄지 마!”
  • 전순란
  • 등록 2017-02-24 10: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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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2일 수요일, 맑음


우리 둘은 자주 유튜브에서 단편 만화영화를 본다. 로맨틱한 만화, 자연세계를 의인화한 만화, 좀 멍청하여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는 코믹을 좋아하지만 스타워즈 식의 싸움질만 하는 공상 만화는 별로다. 아침밥을 먹으며 평소와 달리, 만화를 보며 먹었다. 그런 때 보스코는 시아나 시우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구경에 빠지면 입에 문 음식을 넘기지도 못한다. 그의 중고시절 살레시오 신부님들 손에 크면서 상무대 미군부대에서 빌려온 ‘월트 디즈니’ 만화를 제법 많이 봤는데 그때는 아주 행복했단다.


시아버님이 ‘동광원’이라는 수도원식 공동체 생활에 심취하셔서 시골 땅과 집을 다 팔고, 구루마에 가을걷이까지 싹 싣고 이현필 선생님을 찾아가신 얘기, 6·25 직전 어린 시절을 그 수도원에서 온 가족이 생활한 얘기, 이현필 선생님이 그를 무릎에 앉히시고 시금치 통조림 같은 걸 먹여 주시며 알아듣지도 못 하는 거룩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 통조림은 정말 맛이 없었단다, 말씀은 무슨 뜻인지 몰라도 듣기 좋았고…


지리산의 봄비


그리고 열 살 가까이 되도록 학교를 안 보내주셨는데 동광원 다른 아이들도 지금 말하는 ‘홈스쿨링’을 했는지 취학이 무척이나 늦었단다. 딸이라고 외할아버지가 중학교를 못 가게 하자 어머님이 집을 나와 ‘수피아 여학교’에서 급사 일을 하며 공부하실 만큼 열정적이셨던 어머님으로선(외할머니가 학교 기숙사로 찾아와 애걸하시는 바람에 결국 귀가하신 것이 평생 가장 큰 후회였다고 하시더란다) 큰아들의 교육 방치에 애가 타셨을 게다.


그 뒤 아버님을 동광원 공동체에 남겨 두신 채 어머님만 아이들을 데리고 동명동으로 나오셔서 살림을 차리는 용단을 내려 보스코의 교육이 시작되었단다. 워낙 ‘나배기’로 들어가 한 학년씩 뛰어 2, 4, 6학년만 다녔는데도 중학교 들어가니 딴 애들보다 두 살이 많더란다. 출석번호는 늘 1번을 하는 키로도 공부는 늘 1등이었던가 본데 본인은 나이가 많아서였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었단다.



실생활에 워낙 엉성한 그를 두고 ‘(초등학교) 기초교육이 안 돼서’라고 내가 놀린다. 어머님은 흙마당에 떨어진 밥알도 주워 먹을 수 있을 만큼 깔끔하셨다는데, 동광원 이현필 선생님 영향인지, 보스코는 지금도 씻는 일을 싫어한다. 오늘 아침에도 목욕한지 이틀이나 됐으니 샤워 좀 하랬더니, ‘이 산속에서 더러워질 일이 뭐가 있냐’고 싫다기에 ‘유소년기에 청결교육이 안 돼서’라며 샤워실로 떠밀어 넣다시피 했다. 초등학교 끝날 무렵까지도 엄마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목욕을 했다니까… “정말 세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앞으로 3년 후 여든이 되면 그에게 새 버릇(?)을 들여 봐야겠다.


비가 얌전히 예쁘게도 내린다. 지리산하봉 저 멀리부터 앞산, 뒷산, 휴천재 뜨락까지 소리 없이 다가와 살포시 내려앉는다. 온 맘을 다해 다가오는 봄을 정성껏 안는다. 고맙다. 비 내리는 날은 책 읽기에 딱 좋다. 오늘이 독서모임을 하는 날이어서 윤홍균 작가의 「자존감 수업」이란 책을 마저 읽었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있으니 보스코가 “전순란도 자존감 높일 일 있나?” 라고 놀렸다.


꽃들의 자존감


사실 자존감이란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일이요, 거기에 합당한 실력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만심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인데, 아우님들 입장이 궁금했다. 자기 자존감이 바닥이었다는 친구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했고, 과연 이런 책을 읽는다고 자존감이 올라갈까 싶어 재미없었다는 사람들에게서는 충분한 자존감이 풍긴다.


희정씨는 강신주의 「쫄지마라」라는 글에서 오히려 자존감을 찾았다며 “상관없어. 그렇게 안 살아도 돼. 쫄지 마!”하면 두려울 게 없더란다. 연수씨도 자기 자신에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라면 어려운 상황도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나야 어려선 아버지(‘순란이 저건 뭔가 해낼 게야!’)가, 커서는 남편이 워낙 기를 살려줘선지 충만한 자존감으로 살아온 듯한데 얼마 안 남은 날들 역시 내 자신에 대한 판단을 좀 후하게 주며 살아야겠다. (‘열 자 막대기 휘휘 저어도 걸릴 게 없는 여자’라는 말을 듣는 내가 자존감을 휘휘저으면 주변여자들은 무슨 눈초리를 할까?) 


느티나무 여인들의 넘치는 자존감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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