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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 김웅배
  • 등록 2017-02-24 10:53:48
  • 수정 2017-02-24 1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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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 (사진출처=YTN뉴스 갈무리)


명품 법정 드라마에서처럼 검사측과 변호인측이 서로 날선 공방을 통해 유무죄를 논하는 장면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헌재에서 이루어지는 법정 모습은 정말 낯뜨거워서 쳐다보기조차 민망하다. 대통령 대리인단 변호사들이 벌이는 엽기적인 행태를 비난하기에 앞서 이런 막장 지연술을 시전하고 있는 대통령이라는 사람과 그 추종자들의 비열한 짓거리를 통렬히 비판한다. 더욱이 법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정진해온 법 전문가, 변호사가 법 근처에만 가도 두통이 일어나는 시정잡배만도 못한 경륜을 뽐내고 있으니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


그냥 태극기 집회에 나온 범부들이 멋모르고 그런 말들을 한다면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이론(?)에 따라 허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법 최고 권위인 헌재에서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정말 언어도단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변호사가 말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차후로 미루고 대통령 탄핵 반대론자들이 바람만 불어도 꺼지는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말을 관용구처럼 들이대는 것이 얼마나 구차스럽고 자승자박인지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말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집단 린치 직전에 그녀를 구해내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인기 상승 중인 예수를 흠집 내려고 기득권층이면서 지식인들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인들이 애써 벌인 일이다. 일단 간음한 여인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골탕 먹이기 위한 소도구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간음한 여인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최하층 민초이다. 간음한 여인의 죄는 그들로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간음한 여인’을 빌미로 간음죄라는 법이 아니라 간음죄에 대해 예수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법리적으로 고발하려는 데 있다. 유다인들의 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실제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그들은 예수가 그녀를 용서하라고 하면 조상들의 추상같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요, 돌로 쳐 죽여도 된다고 하면 매일같이 예수가 부르짖는 자비와 용서는 무엇이냐고 반박할 것이다. 그로 인해 예수의 위선을 폭로하고 또한 로마가 정한 법을 어기게 되어 반역자가 될 수도 있으니 그들로서는 즐거운 꽃놀이 패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처리하지 않고 굳이 예수 앞으로 데려 온 이유다. 차마 비유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우리나라 법비의 조상이다.



예수님은 여유 있게 대처하신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상황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라는 말은 돌을 맞을 자가 이미 죄를 지었다는 것도 전제로 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다.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돌로 치려는 것이냐?’이다. 촌철살인의 이 말씀은 간음죄에 대한 법리적 실정법에 대한 물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동문서답이면서 우문현답이 되어 버렸다. 예수님의 잔머리(?)와 순발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고 하면 실례되는 말이 될까? 


안 들킨 죄인이라는 말을 우리 신자들 간에 흔히 한다. 들킨 죄인은 감옥에 가지만 안 들킨 죄인은 버젓이 사회생활을 한다. 예수는 이미 간음할 생각만 해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안 들킨 죄도 당연히 죄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간음죄에 대해 기득권층의 소위 법리적 해석을 깨트림과(사실상 당시 기득권층이 행한 간음죄는 물어 보나마나다) 동시에 실정법에 앞서 간음한 여인을 자연법적 인권 존중의 의미로 본 것이지 그 간음죄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법비들은 실정법의 법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연법을 무시하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법을 배우지 못한 나 같은 필부도 손가락만 움직이면 구글 검색을 통해 웬만한 법에 관한 문제는 쉽게 검색할 수 있을 정도의 세상이 됐다. 그런데도 법비들은 일반인들도 알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자연법적 판단은 무시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법리문제만 금과옥조처럼 들먹이며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김기춘류의 법비들이 자신들이 빠져 나갈 구멍으로 이를 이용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대표적인 것이 삼성 엑스 파일 사건과 초원복집 사건, 최근에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이다. 정윤회 국정농단 사건이 말도 안 되는 국가 정보 유출 사건으로 둔갑한다. 그것도 자기들 내부에서 벌인 일이다. 문건 유출이 국정농단보다 더 중한 죄란다. 삼척동자도 울고 갈 희한한 광경이다. 독수독과에 의한 증거물은 형사재판에서 인정이 안 된다고 한다. 이 조항을 역이용하여 삼성 엑스 파일 사건은 넘어갔다. 이 또한 억울한 사항이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줄이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법비들은 이 조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먹고 말았다. 이 나라 법조계에서 이러한 법 왜곡 행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늘 이루어져 왔으니 헌재에서 대통령 대리인들이란 자들이 저지르는 망발은 사실 이미 예정된 거나 다름이 없다.  


간음한 여인은 가난하여 몸을 팔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일시적, 개인적인 죄를 지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간음한 여인은 최하 기층민이다. 공적 책임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다. 공공을 위한 책임의식으로 모든 시민들에게 공동선을 펼쳐야 할 대통령도 물론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그 권위에 상응하는 무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그만한 권력과 최대한의 편의를 그에게 준다. 그러한 권력을 함부로 이용해 국민연금 같은 공공의 이익을 사익으로 전환하여 부정을 저지른 대통령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간음한 여인과 같은 위상인가! 눈에 레이저를 뿜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근혜라는 대통령이 인권이 있는지도 모르는‘가냘픈 여인’과 같은 죄라도 지었나?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고 인정하기 전에 이러한 상황이 도래된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져야한다. 가뭄이나 홍수로 야기된 자연재해에도 스스로 베옷을 입고 하늘에 용서를 빌었던 과거의 왕만도 못하면서 왕 노릇을 할 때는 언제고 그저 용서만 비는 힘없는 ‘간음한 여인’의 불쌍한 모습으로 코스프레를 하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모든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멋있는 말이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최하층민으로 사회의 최대 약자인 ‘간음한 여인’이 법 앞에서 똑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사례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나라는 위대한 정의, 평등, 자유 민주국가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저 기댈 곳 없는 민초까지 만인이 평등하다’는 개념은 법률 책에나 있지 미안하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는 없다. 제발 있어주길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법률로도 이미 없어졌지만 어떤 여인의 사적인 간음 행위는 유다에서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대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로 볼 때 큰 죄처럼 보이는 죄를 지은 가냘픈 한 여성을 인권적 차원에서 용서 한 것이다. 그 용서도 조건이 달린다.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여성이 한 인간으로 대접을 못 받고 남자의 부속물로 여겨지던 때 사람들의 의식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을 놓고 떠난 행위는, 세상 경험의 과다에 따라 개인적 차원의 자기  반성으로, 한 여인을 단죄함으로써 자신과 죄의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가 자기 멋대로 법을 어긴 세상의 권력자를 용서하자는데 사용될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폭압을 일삼은 헤로데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그냥 당시의 법 그대로 간음한 여인의 죄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죄라면 대통령이라는 박근혜는 어떤 벌로 치죄를 해야 하나? 간음한 여인도 용서를 받았는데 박근혜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놈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모두 무죄다 라는 꼴이다. 극단적인 종교적 도그마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닌 듯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의미의 인간이 가진 원죄와, 실존적으로 삶을 영위하며 짓는 죄와는 당연히 구별이 된다. 인간 사회에 자연법이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선임된 변호사는 그를 위해 무죄를 주장할 수 있고 확실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징벌의 경감을 두고 어떤 거래를 해서든지 자신의 의뢰인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얘기다. 그렇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변호인들이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무죄의 확신이 들게 해야만 하는 아주 상식적이고 증거에 의한, 틀림없는 과학적 해명이 필요할 뿐이다. 변호사가 법정에서‘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죄(?)가 없다고 꿋꿋이 버티는 대통령을 변호함에 있어서 어려운 일이 무엇이며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국격’에 맞게 제발 법리를 들먹이지 말고 순수하고 품위가 있으며 격조 높은 변론을 하기 바랄 뿐이다. 법을 어긴 자가 법리를 들이대는 것은 모순 아닌가?


헌재의 재판관은 물론 거기에 출연하는 모든 법조인들에게 관용구로서가 아닌 실제 요한 복음서 8장 1절에서 11절까지 자세히 꼼꼼히 읽어보시기를 강추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변호인단에게 묻고 싶다.“죄 없는 자가 먼저‘대통령’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이 정말 진심인가? 그 말 자체가 대통령은 죄가 있다라는 뜻인데도?  


그런데 그게 진심이라면 당신들의 치졸한 변호 행태는 정말 돌로 맞아도 싸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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