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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없는 ‘악귀들의 왕국’, 더 이상 악을 보태지 말라
  • 김웅배
  • 등록 2023-09-22 16: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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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협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극’을 다하면 협객이 등장하여 악인을 처단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권선징악 플롯이다.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이러한 결말에 환호한다. 대리만족, 즉 카타르시스의 최고봉(탄핵)이기도 하다. 영화 스토리 상에서 무한권력을 가진 권력자에게는 영화가 끝이 날 때까지(러닝타임 5년) 개과천선이나 후회라는 단어가 없다. 


무협영화의 양축은 악인인 권력자와 어떤 목적이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제거 대상(민주세력과 거기에 동조하는 야당)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놉시스는 아주 단순하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량한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일상생활을 하는 장터에 ‘삥’뜯는 조폭들(검찰)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지시(이념)에 따르지 않는 상인들을 줄 세우고 핍박(영장청구)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의 자식까지 볼모로 위협을 가한다(특수부 수사). 그 도가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이 말리면 그들마저 무자비하게 짓밟는다(압수수색).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언제나 진압당한다.(구속수사) 


그 무법자들은 윗선의 비호(격노)를 받으며 사적 폭력(조작수사)을 마음껏 행사한다. 그러다가 무명의 고수(대안언론)에게 싸대기를 당한다. 그들은 윗선에 고자질한다. 권력자는 현장을 통제 못하는 조무래기들 보다 지난 세월 악명을 떨쳤던 한물간 고수를(언론통제) 구해온다. 그리고는 더 악랄하게 백성들의 원성(소위 가짜뉴스)을 잠재우려 한다. 그러나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판관 포청천(공수처)에게 되치기(기각)를 당한다. 아직 종말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협영화의 결말은 초반을 지나 이미 시작되고 있다. 


무협소설의 효시인 중국고전의 걸작 수호전은 108명의 반정부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반역집단으로 취급된 양산박(재야 민간단체)은 탐관오리와 저질 정상배들을 가차없이 처리(고발)하지만 한계가 있다. 중국 북송 시대, 흉악했던 시절 이들의 의기는 만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조정으로부터 반역도당으로(여당대표에 의해)낙인이 찍혀 지명수배를 당하지만 모든 백성이 그들의 도피처(연대)를 마련해 준다. 수호전에서도 보듯이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복수극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복수의 대상인 악인은 언제나 이미 저지른 악행 위에다가 더한 악을 보태기 때문에 막판 복수의 반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헤로데 영주는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온갖 악행 때문에 요한에게 여러 번 책망을 받고, 그 모든 악행에다 한 가지를 더 보태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루카 3장19-20) 


요한을 가두었지만 결국 헤로데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예언자 요한의 목을 자른다. 헤로데의 부정한 왕비가 끈질기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이 천년 전 저편 유다 땅에서 일어났던 ‘언론탄압’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강시’처럼 다시 출몰하고 있다. 민초들이 만든 자발적 언론의 질타가 죽기보다 싫은, 권력과 탐욕에 찌든 집단은 자신들의 악을 덮기 위해 더 큰 악을 세상에 펼친다. 이들은 엔딩마크가 뜨기 전까지 무자비한 폭력(합법으로?)을 자행한다. 


그렇게 당하고 당한 민초들은 영웅이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결국 별다른 무기도 없는 협객(촛불)에게 악인은 무참히 깨지고 박살난 후에 엔딩마크가 찍힌다. 이 B급 액션 무협영화가 이 정권에 현재이고 미래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팝콘각이라는게 창피스럽다. 킬링타임용 카타르시스를 위해 그냥 객석에 앉아 이 무협영화를 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차원 낮은 드라마의 시놉시스가 우리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의 나라 몰골이 한심스럽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하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악이 득세하는 듯한 초반에 반 권선징악적 뻔한 스토리가 무슨 그럴듯한 배경장치도 없이 대명천지에 그대로 시연되는 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 선진국 대한민국이란다. 이 나라의 ‘왕’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서슴없이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안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 이라고 말하며 호모 사피엔스를 태동하고 현생 인류의 영원한 어머니 대륙 아프리카를 모독하기까지 한다. 원시적 야만시대에도 존재했던 상식적 묵계마저 내팽개치는 자가 자칭 왕이라니 헤로데도 울고 가겠다. 온갖 비상식적 비합리적 행태가 하루가 멀다 않고 다반사로 일어나니 장삼이사 민초들도 미친 듯한 정상배들의 작태를 화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 꺼리며 손사래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도면 혐오정치를 넘어 패륜정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권력자의 무도한 권력남용이나 직무유기 사태가 발생해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고위 정상배들의 적반하장 뻔뻔스런 행태는 평범한 소시민을 ‘극렬’의 민주투사로 변환시켜 버린다. 일제치하도 아닌데 민주공화국 전국민을 독립투사로 만드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친일파를 대거 기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던 이승만도 6.25 한국전쟁 당시 밀리던 전세를 만회하려는 미국의 입김으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발을 디디려고 하자 ‘격노’를 하며 북으로 향한 대포를 남쪽으로 돌리겠다고 사자후를 토했었다. 우리가 일본을 적대시하는 것은 문화 교류나 민간인 경제적 왕래를 통해 상호존중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극우세력이 군국주의 부활을 노리며 미국을 등에 업고 위압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위 나라에 대한 일말의 배려는커녕 일본의 군국주의적 행태를 여과없이 보여준 것은 핵 폐수를 여과했다면서 소위 ‘처리수’라고 주장하는 ‘깨끗한 물’(?)을 결정적으로 방류한 것이다. 이를 적극 동조하고 그들의 온갖 뒷배 노릇을 하며 홍보해 주는 이 나라의 정권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국익을 최선의 목적으로 삼는 보수 우파 세력은 도대체 왜 그들과 한 패가 되려는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본의  ‘극’우가 어떻게 한국의  ‘극’우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좁혀 말하면 자신의 나라만을 위한다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 극우의 이념이다.  


‘극단적’이라는 말은 당연히 부정적 단어이다. 극좌나 극우라는 의미는 그래서 별로 좋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극단적 민족주의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어떤 자는 내심 제국주의를 꿈꾸는 일본의 획책을 애써 무시하고 ‘반일 종족주의’라는 말로 우리의 반일감정을 희석시키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런 우리의 극우는 일본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이게 매국세력이지 무슨 우파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정직한’ 일본과 두번 째 소위 ‘내선일체’를 꾀하려는가? 백여년 전 대륙 진출에 잠시 성공했던 일본에게 다시 ‘대동아 공영권(?)’의 명분을 제공하려는 것일까? 이게 우리나라의 극우인가?


‘극’보수의 막무가내식 지지자들은 ‘홧김에 서방질’ 하듯 지금의 이상한 정권을 세워놓고서는 합당한 논리도 없이, 좌파라면 살펴보지도 않고 척살하려 든다. 이들이 주야장창 노래를 불렀던, 지금은 부르지도 않지만, ‘공정과 상식’ 중에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상식을 택하겠다. 공정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순하게 ‘상식적’으로만 사회가 굴러가도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국정 운영에 지친 ‘왕’의 눈물겨운 ‘노고’를 봐서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상식선에서 판단할 여지가 있다면 수긍할 수도 있다. 검사 사위를 둔 바람에 어찌어찌 투기해서 논마지기를 확보했다면, 비록 공정치는 않지만, 적어도 강제로 물길을 돌려 자신의 땅에만 물을 대려고 온갖 천박한 노력만은 하지 말자. 삼척동자도 알만한 ‘상식’이 배제되어 있다면 그게 동물의 왕국이지 인간의 세계인가? 아니 동물의 세계에도 자연의 질서는 있다. 그래서 주어를 바꾼다. 동물의 왕국이 아니고 ‘악귀들의 왕국’이라함이 옳다. 


공익적 국책사업이 치부의 수단이 되고, 힘있는 자의 호불호에 따라 잘못한 자를 처벌하지 못하게 하고, 공동선을 이룬다는 자각도 없이 ‘왕’의 무리들은 무제한의 공권력을 그들만의 사익을 위해 전횡을 일삼고 있다. 이제 겨우 1년 반 지난 정권의 작태를 보면 수오지심이라곤 모기 눈꼽 만큼도 없는 인면수심 파렴치 몰염치가 ‘극’에 닿고 있다. 민초들의 함성에 밀려 ‘러닝타임’이 다 이르지도 않았는데, 이 무례하고 무지한 자가 막판에 몰려, 무협영화 악인들의 최후수단으로 흔히 사용하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흉내 낼까봐 그것도 심히 걱정된다.


이제부터라도, 간언컨대, 뱀같은 헤로데나 무협영화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들처럼, 제발 이제껏 쌓아 온 악행에다가 더 하나의 악을 보태진 말아라! 제발! 이것이 남은 3년 반을 견뎌야하는 민초들의 아주 ‘극’미량의 소망이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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