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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여자는 아플 새도 없고 엄마는 아프다는 말도 못 꺼내는…
  • 전순란
  • 등록 2017-03-17 10: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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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6일 목요일, 맑음


날이 너무 가물어 겨우내 땅을 움켜쥐고 살아남은 바랭이까지 슬쩍만 당겨도 흙을 툭 놓아버린다(뿌리를 놓는다는 것은 식물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마다 퍽~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퍼지니 안경 유리가 뿌옇고 입안은 지금지금하다. 그 먼지가 안경에만 끼겠는가? 눈까지 빽뻑해져 문지르다 보니 뭐하나 시원하게 보이질 않는다.


어제 오후에 백전을 가려고 나설 때 보스코가 물뿌리개를 고치느라 수도전 옆 화단에 앉아있는데 내가 자기를 못 보고 그냥 가더란다. 수돗가 감자 박스 안에 싹 난 감자를 보고 싹을 따서 뇨끼나 해먹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도 그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을 못 알아보다니… 나이가 들며 이것저것 여수고 잔소리 말고 나머지 인생이나 잘 살아 가라는 하느님 배려일까?



어제까지 태업을 한 눈이 아침에 잘 안 떠지기에 안약을 넣고서 솜으로 안구를 닦아보니 핑크색 흙이 묻어 나오고 많이 쓰라리다. 이웃 마르타 아줌마가 한번은 내가 색안경을 쓰고 밭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건 얼마나 하냐? 한참만 안 비싸면 나도 하나 사서 쓰고 싶다. 밭 매다가 눈에 흙이 한 됫박은 들어간다”라던 말에 수긍이 간다. 아줌마에게 커다란 잠자리안경을 하나 사다 드릴까 했다가 동네 아짐들의 입방아에 그니가 절대 못 쓸 것 같아서 참았다.


아침 기도를 하며 줄곧 눈물을 닦아 내고 있으니까 보스코가 하는 말, “전순란, 춘삼월 좋은 시절 다 갔다” 어찌 춘삼월 꽃시절만 좋으랴! 태양이 이글거리는 검푸른 여름도 있었고, 낙엽 지는 서러운 시간도 가는 중인데, 저 산에 흰 눈 덮인 흙이 되어도 ‘주님의 시간 안에’, ‘그대와 함께라면’ 언제나 행복하리라. 


점심 후에는 어제 사온 아로니아 두 포기를 심고 양파와 감자 두럭에 물을 주었다. 부추밭도 다듬었다. 텃밭에 나무가 늘고 방풍초, 신선초 같은 약초가 점유하는 터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농부가 게을러진다는 표이기도 하다. 



캐나다로 남편을 보내고 심심했던지 친구가 전화를 했다. ‘평화여성’에서 그니와 함께 일하는 선배의 안부를 물으니 늘 몸이 안 좋아 사무실에도 자주 못 나온단다. 그 선배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최근에 선배에게 들은 말을 전해준다. 누군가에게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했더니만 “선생님 아프시다는 건 새로운 소식이 아니잖아요?”라고 잘라 말해서 많이 서운했다더란다. 나이 먹으면 어딘가 끊임없이 망가져 가는 게 당연지사이지만, 아프다는 말을 어쩌다 혹은 쉴 새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주변을 무겁게 하나보다.



내 친구도 남편이 어딘가 늘 아픈 곳을 ‘발굴’해내다 자기가 아프다면 더 소란을 피우니까 본인은 아예 아프다는 말을 못 꺼낸단다. 우리 보스코가 바로 그렇다. 늘 아픈 곳을 ‘챙겨’ 놓았다가 “나 아야 해. 호~해줘!”하는 식이라 나도 아프다는 말을 감히 입밖에 못 내다보니 남편은 나더러 “천하장사 전순란 마징가 제트”라 추켜세우고 주위에서도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굳어졌다. 정말 여자는 아플 새도 없어야 하고 엄마는 아프다는 말도 못 꺼내는 숙명일까?


5시까지 미루한테 가서 차를 대접받고, 함께 성심원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종교연대의 ‘길동무’ 합창단에 끼어 연습을 했다. ‘비쥬얼’ 합창단이라는 별명에 맞게 노래 실력은 늘 그 자리지만 그래도 만나면 행복하니 아마 듣는 사람들도 행복할 게다.


오늘이 ‘산청촛불집회’ 마지막 날이자 ‘세월호 1000일기도일’이기도 해서 원지로 갔다. 시민공원에 ‘간디학교’ 2, 3학년 학생들이 모두 참석했고, 그동안 촛불집회를 진행해왔던 분들도 다 함께 했다. 청학동 오교수님을 비롯해서 이 일대에서 환경운동, 사회운동에서 얼굴을 익힌 분들이 다 보였다.




이 작은 산청, 원지마을에 깨어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고맙고, 그이들의 분노와 촛불에 힘입어 시국을 정리해나가면서 우리나라의 미래, 저 젊은이들의 정치적 깨우침에 우리 희망을 건다. 박남준 시인의 추모시가 낭송되고, ‘수수’를 비롯한 서너명 노래꾼의 노래, 간디학교 학생들의 합창, 우리 종교연대의 ‘길동무’의 합창(관중들의 평가가 ‘많이 늘었다!’라니)으로 이어지던 행사는 8시 반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1000일기도를 염송하며 끝났다. 미루네가 산청까지 실어다 주고 거기서부터 밤운전을 하여 집에 돌아오니 9시.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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