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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음정 모닥불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 전순란
  • 등록 2017-03-20 10:46:33
  • 수정 2017-03-20 10: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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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9일 일요일, 맑음


지난번 꼬마 손주들의 서울 방문 때 모니터를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두 손주들을 향해 간절히 동의를 구했다. “얘들아 이 사진 좀 봐. 이 아줌마 정말 예쁘지?” 애들은 대답이 없을 뿐더러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 애는 지들 엄마 아빠의 결혼 앨범을 보고 있었고 작은 놈 시우는 사진 속에 자기 모습을 찾으며 왜 자기가 빠졌나 투덜거렸고, 큰 놈은 뭘 좀 안다는 어투로 “생각 좀 해봐라 거기 어떻게 니가 있겠니?”


그래도 할아버지는 전날 애들이 점심도 얻어먹었으니 철 있는 시아라면 동의를 해주겠지 싶었는지 “시아야, 와서 이 사진 좀 봐라, 아줌마 이쁘지?” 그런데 괘씸하게도 큰놈마저 사진 한번 훑어보고서는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식의 반응이고, 작은 놈은 자기에게 질문이 오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결혼앨범에서 눈도 안 떼고 “우와, 너무 이쁘다 (울 엄마)오지선” 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한 장 넘겨 지 엄마 얼굴을 다시 꼽으며 “너무 예뻐 미치겠다” 하고 다른 쪽으로 쓰러지고를 반복한다. 세 남자의 철없는 문답을 듣던 며느리와 나 두 여자는 심경이 어땠을까?



역시 사랑은 주관적이다. 그리고 정말 대책 없이 주관적인 사랑의 소유자 한 분을 우린 알고 있다. “도대체 저런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을까?” 인간들이 의문을 제기 할 때 그분의 사랑을 ‘은총’이라고, ‘당신이 예정하셨다’고 설명해 준 신학자도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대책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이다. 


오늘 복음엔 사마리아 여인 얘기가 나온다. 보통 미사 중에는 짧은 복음을 읽기에 아침기도에서 긴 복음 전부를 읽었다. 딴 여자들의 눈총과 입방아를 피해 뜨거운 대낮에 물 길러 나온 여인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주시오” 우물가에 앉아있던 유다인 남자가 한 마디 하자, 딴 남자들처럼 자기를 깔보고 ‘작업 거는’ 줄로 알았을 꺼다. 


그러나 그 남정의 깊은 시선이 자기의 과거를 꿰뚫어 보고 자기 영혼의 갈증을 간파하자 그만 당황한다. 엉망진창으로 실타래처럼 꼬인 자기 인생을 ‘메시아’라는 전설적 인물이라면 혹시 풀어 주지 않을까 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입에 올리자 그 멋진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당신과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이 말씀에서 보스코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사마리아 여인의 심금을 울렸을 그 떨림이 전달되고, 그리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바로 그 분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가슴이 벅찼다.


요 며칠 휴천재 마당은 봄소식으로 혼미하다. 아름드리 천리향은 나비 한 마리 없어도 그 향기를 천리 밖으로 실어 나르고, 은목서 그늘의 크로커스는 수줍게 꽃을 피워 올렸다. 3년 전 대구 분도수녀회 정원지기 체칠리아 수녀님이 한줌 주신 수선화는 세를 불리다 오늘 첫 송이를 피웠다. 은목서와 나란히 붙어 몸살중인 동백꽃도 어렵사리 꽃잎을 여는 중이다. 봄이다.



오후 5시, 음정에서 안식년으로 쉬고 계시는 장 신부님께서 우리 공소 식구들을 당신의 거처로 초대하셨다. 우리가 먼저 초대했어야 했지만 우린 기꺼이 그 초대에 응했다. 아마 그분은 우리 공소의 냉랭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단합대회를 마련하신 듯하다. 모처럼 마천의 가족들도 오고 스.선생까지 왔으니 성공적인 초대였다.


5시 미사시간에도 신부님은, “하느님만 우리 주인이시니 내가 어디서건 주인 행세 해봤자 짧은 인생에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나?” 타이르셨다. 하느님 뜻에 맡겨드릴 때 그분이 함께하심을 알게 된다고도 하셨다. 잘난 체 말고, 서운한 맘 없애고,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긍정적인 자세로 지내라신다. 뭔가 알고 하는 말씀같다.


5시 40분부터는 마천 오석 위에 삼겹살을 굽고, 신부님이 몸소 뜯어 오신 쑥국에다 여자들이 한 접시씩 마련해온 반찬으로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솔방울과 대나무와 청솔가지가 투명한 불꽃을 튀기는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아 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는 늦은 시각까지 웃고 떠들고 노래부르며 놀았다. 신부님은 목자답게 우리 가난한 마음을 이미 알고서 치유의 첫걸음을 떼신듯하다. 참 고마운 분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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