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가 오늘 20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시작됐다. 주교회의 정기총회는 16개 교구 주교 전원이 모여 한국 교회 주요 현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다. 주교들은 20일부터 24일까지 닷새간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후 결정 내용을 발표하게 된다.
그런데 2017년 춘계 정기총회에 상정된 안건들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주교회의는 매장과 화장된 유골의 보존에 관한 교황청 훈령을 한국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천주교 용어집」(개정 증보판)과 「한국 천주교 성음악 지침」개정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관한 지침과 해설(안), 중학생을 위한 생명교육 교재를 심의한다.
회의 3일째 되는 22일에는 명동대성당에 모여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가 집전하는 ‘교황프란치스코 선출기념 미사’를 봉헌한다고 밝혔다.
이 땅의 대통령이 불과 열흘 전 탄핵당했다. 파면 결정이 나기까지 시민들은 지난해 겨울부터 차가운 광장에서 소리 높여 ‘이게 나라냐’를 외쳤다.
이제 뭐가 좀 달라지는가 했더니 미국 미사일 방어의 일환으로 사드가 대한민국 땅에 들어오면서 중국과의 외교 불화로 경제는 불안정하기만 하고 성주 땅에는 하루도 촛불 꺼질 날 없이 집회가 이어지고 있으며 부산 오륙도 앞에는 핵추진 항공모함이 들어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국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산 사람들의, 살기 위한 아우성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시국에 주교들이 모여 죽은 이들의 매장과 화장의 교리 문제를 따진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야속하고 부끄럽다.
엄동설한에도 광장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 손에 들린 촛불은 꺼지지 않았는데, 주교들은 그 길고 긴 날 중에 하루도 함께 나와 불을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재의 결정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자들도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교들은 과연 ‘회개’의 참뜻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시민들과 이렇게도 동떨어진 의식을 가진 주교들이 ‘천주교 용어’는 대체 어떻게 심의하겠다는 말일까.
중학생을 위한 생명교육 교재를 심의한다고 하니, 과연 그 교재에는 날로 심각해지는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문제로 그야말로 우리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실려 있을까. 인류와 민족이 당면한 생존문제를 외면하는 교회가 ‘중학생들의 생명교육 교재’를 만들고 심의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지 의구심이 든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와는 동떨어져 살아가던 주교들이 정기총회 중에 교황선출기념 미사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모순인가.
지금 교회는 쇄신을 바라고 있다. 교회의 조직과 사람을 일신하고자 교황은 여러 차례 지역의 주교들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급변하는 21세기에서 한국천주교회 사목환경은 제자리를 걷고 있고, 교우들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으며 교회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날로 거세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번영의 길에 들어서면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닌지 불안하다.
지금, 주교 회의에 필요한 안건들은 무엇인가? 시급한 교회의 현안은 무엇인가?
적폐청산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한 교회의 대안이나 참여 방법에 대해 논의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대구 희망원, 인천성모·국제성모병원 사태, 명분 없는 성지개발과 교회건축 비리와 같은 눈앞에 벌어진 일 말고도 이미 예견된 악재들이 빨간불을 켜고 응급상황임을 여러 차례 경고했다.
지금은 어떻게 한 푼이라도 더 모아 새 성전을 지을까 고민하고 숫자놀음의 선교를 말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배웠듯이 교회도 권력의 집중을 막는 쇄신, 재정과 인사, 정책과 행정을 분할하고 통제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쇄신이 시급하다. 주교 혼자서 모든 권력을 쥐고 권한을 행사하는 지금의 비정상적 상황을 인정하고 이를 분화, 견제, 감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시급한 과제다.
교회는 주교들, 사제들, 수도자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가 함께 운영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와 누구처럼 경제공동체이기 전에 신앙공동체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면 적폐청산과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한 공동의 노력 앞에 분명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그 길 한가운데 사목자로서 주교들이 함께해 준다면 같이 촛불 들고 불 밝히지 않을 이 누가 있을 것인가.
죽은 이들의 매장과 화장에 관한 교리보다 더 시급한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