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의 세계사편력”은 인도의 독립 운동가 네루가 1930년 10월 26일부터 1933년 9월 8일까지 딸에게 보낸 196통의 옥중편지를 묶은 명저다. 서양사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제외된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아메리카 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광수의 “네루의 세계사편력 다시 읽기”는 네루의 원저를 쉽게 풀어쓴 해설서이자 교양 역사서다. 원저를 기반으로 원저에 없는 역사 속 장면을 현대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을 비판하며 세계사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네루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을 통해 세계사편력을 비판적으로 다시 보고 있다.
저자는 지배당하고 착취당한 이들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훑어 나간다. 이러한 관점은 네루의 역사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루 역시 지배와 피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사는 서로 다른 지역의 상호 교류와 종합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국가 혹은 문명의 번성 이유를 권력자나 지배자 개인에게서 찾는 기존의 역사 서술이 놓치는 역사의 이면을 볼 수 있다. “로마에는 귀족과 평민 계급 외에 방대한 수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권도 없었고 소나 개처럼 주인의 사유재산일 뿐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영화는 바로 이 광범위한 노예제도를 토대로 이루어졌지요.”(47-48쪽)
흔히 고대 역사는 그리스와 로마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로마가 번성할 때 동양에선 중국이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치면서 중앙 정부에 기반을 둔 국가를 성립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나라는 마법이 횡행하는 신비의 나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유럽인들의 사고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우리의 역사관과 세계사 서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알렉산드로스를 ‘대왕’이라고 높여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대왕이라 부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36쪽)
이 책은 고대와 중세에 비해 근현대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흔히 유럽이 19세기 들어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유를 유럽만의 고유한 문화적 우월성 혹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저자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근현대 역사와 유럽의 팽창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지역은 고대와 중세 시대 그 어떤 지역보다 문명의 꽃을 피웠지만,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졌다. 흔히 이슬람 종교에서 그 원인을 찾지만,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도 분쟁이 계속되는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를 보여준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이 문제의 성격을 종교 혹은 문화 사이의 충돌로 몰고 가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경제 문제입니다.”(242쪽)
저자는 ‘세계사편력’의 내용을 단순히 해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네루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한다. 서구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네루는 인도 혹은 힌두 민족의 패권적 팽창이나 카스트제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네루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한계를 지적한다. “네루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민족운동을 이끌어가던 지도자로서 역사의 진실을 보는 것보다 민족 전체에 자긍심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27쪽)
‘세계사편력’은 네루가 독립운동을 벌이던 1930년대 이전까지의 세계사를 담고 있다. 80여 년 전 네루가 세계를 바라보던 두 가지 축, 즉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여전히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현대적 제국주의의 전형은 뒤늦게 유럽으로부터 독립해 초강대국으로 거듭난 미국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더 이상 남아메리카에 예전 방식으로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상품을 통해 그들의 시장을 장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것으로 아무런 외부적 징후도 없는 착취와 지배입니다.”(198쪽)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자본주의는 이제 세계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체제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새 옷을 입은 자본주의는 경제적 지배를 토대로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현재의 이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 세계의 모순을 짚고, 더욱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류 사회를 건설할 우리가 '세계사편력'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인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이광수(부산외대 교수)는 한국사, 중국사, 유럽사에 치중된 한국의 역사 연구 풍토를 비판하면서 역사학과 다른 학문과 교류 확대를 주장한다.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사진 연구에 최근 몰두하고 있다.
저서: 슬픈 붓다, 현대 인도 저항운동사, 사진 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등. 역서: 인도고대사, 사진으로 제국 찍기 등이 있다.
가톨릭 프레스에 “산 종교 죽은 종교”를 저자 이광수는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