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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4-07 18:59:20
  • 수정 2017-04-07 19: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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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0,4-7) 해설

<수난하시는 종은 박해자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당신을 내맡기신다>


종에 관한 세 번째 노래인 이 대목은 다른 두 노래와 차이점이 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인물은 분명히 ‘종’이지만(참조. 10절), 그 종이 보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은 제2이사야의 ‘종’에 관한 ‘고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이 대목도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첫 언명(言明)은 ‘제자’로서 예언자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달자로서 전언(傳言: 메시지)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고, 그에게 당신 말씀을 내려, 자기 자신의 말을 아무것도 덧붙임 없이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예언자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분명히 하셨다.


종에 관한 둘째 노래에서 어렴풋하게 암시된 다른 측면 하나가 셋째 노래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가 폭행을 당한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단순히 예언자가 당하는 몰이해와 박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난이 예언자의 사명에 속하고, 실상 그 자신이 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올바름이 가려질 것을 알면서 “차돌처럼 얼굴빛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수난의 의미는 종에 관한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에 가서야 충분하게 설명할 것이다.


종이 받은 소명의 이 같은 측면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것으로 취하고, 당신 수난에서 재현하셨다(참조. 마르 8,31; 9,31; 10,33이하).


시편(21) 해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서 이 시편도 ‘종’이 받을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되고, 그 인물 안에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수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당신 안에 수렴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백성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의 길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이다.



제2독서(필리 2,6-11) 해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


그리스도교가 옛날부터 불러온 이 찬미가는(아마 바오로가 몸소 쓴 것이리라) 그리스도께서 이사 52-53에 나오는 수난하는 종과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행구들을 찾아보자. ‘자기 자신을 버렸다’(7절: 이사 52,12), ‘종의 신분’(7절: 이사 52,13),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다’(7절: 이사 52,14), ‘죽기까지 순종하시다’(8절: 이사 53,12), ‘하느님께서 그를 들어 높이셨다’(9절: 이사 52,13)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돋보인다.


- 여기서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종’이 되라고 소명을 내리신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고 계신 분’, 최종적으로 ‘주님’이라 불리시는 분, 모든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 붙여 드리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가지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종’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사 53,10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하느님 홀로 ‘종’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 없는 분만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고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2코린 5,21; 요한 8,46).


마지막으로 10-11절에서 이사 45,23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즉 주님)라는 대명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님’으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심으로써 ‘주 하느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섬기러 오신 ‘주님’이시다(참조. 마르 10,45).


복음(마태 27,11-54) 해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께서 올바른 분이심을 인정한다. 오히려 종교 당국자들에게 속은 백성이 자기들이 잘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유다인 당국자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로 끌고 간다. 자기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해서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단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실제로 사형시키려고 로마 총독에게로 가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왕으로 칭함으로써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한다.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모함하고 있음을 눈치 챈 빌라도는 예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은 그들을 단죄하고 고발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로마에 대한 반역죄를 지은 적이 없음을 알고서도 유다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 때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유다인들의 관습을 이용하여 예수를 풀어주려고 한다. 그러다 유다교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께서 아니라 바라빠를 놓아주도록 청하게 한다.  


바라빠는 로마 권력을 몰아내려다 붙잡힌 반란범으로서 열혈당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무기만을 가지고 싸우신 분이었다. 그런데도 유다교 지도자들과 백성은 로마에 반기를 든 반란범이 아닌 사랑과 정의의 깃발을 드신 예수를 사형에 처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권력의 온갖 표시(진홍색 외투, 가시관, 갈대 지팡이, 경배)로 예수님께서는 웃음거리가 되신다. 그러나 그 옷을 벗고, 다시 말해서, 그 헛된 왕권을 내팽개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진정한 왕으로서, 즉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는 분으로서 드러내 보이신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지배자는 특권층을 보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닥 사람들을 섬기고 보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정 없는 부자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무시하고 천대하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신다. 고달프고 서러운 사람들이 더 이상 짓눌리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신다. 


▲ (사진출처=JTA)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예수에게 바로 사형을 집행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덜어 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으신다(참조. 시편 69,22).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 그들의 어려움을 마지막까지 겪으려 하신 것이다. 그리고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는다(참조. 시편 22,19). 예수님께서 매달려 계시는 십자가 위에는 사형죄목이 적힌 명패가 박혀 있다. 이 명패는 예수님께서 유다 백성과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구세주-왕이심을 나타낸다. 그런데도 백성이 당신을 배척한 것은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재물과 권력을 좋아하던 유다교 당국자들은 백성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전함으로써 참된 해방을 안겨 줄 왕을 고발하고 죽였다. 권력을 잡아야만 백성을 해방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열혈당원들도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백성의 생명과 자유를 빼앗아 쌓은 재산과 권력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나눔과 섬김만이 백성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음을 분명히 하려고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분명히 실패한 것 같았던 예수 죽음의 온전한 의미를 믿음이 발견해 낸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심판 날이 오고 부활의 시대가 시작한다. 죽음을 낳고 죽이는 사회질서와 세계질서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생명이 온전히 나타난다. 이제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마저 당신을 버리신 것 같은 처절한 고독 속에서 숨을 거두신다. 숨을 거두는 순간 당신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넘겨드리신다. 하느님 아버지께 조건 없는 신뢰를 드러내신다. 당신이 세례를 받을 적에 받은 성령, 당신 생애 내내 당신을 인도해 주신 성령을 아버지께 넘겨드리신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당신을 믿고 당신처럼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엘리(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엘로이’, 나의 하느님)를 부르자,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는 줄로 잘못 알아듣는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자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려 죽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더 이상 성전이나 지성소에 갇혀 계시지 않고 예수 안에 그리고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여 계시고, 예수님의 복음과 계획이 짓눌리고 빼앗기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며, 예수님의 부활이 당신을 따라 사랑과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투쟁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하려 한다.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과 군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한다. 군인들의 그런 신앙고백은 군인들을 앞세워 폭력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고백이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0,4-7)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시편(21)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제2독서(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형제 여러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수난 복음(마태 27,11-54)

<마태오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총독이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께서는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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