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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벌써 꽃비가 내리는 절기라니…
  • 전순란
  • 등록 2017-04-14 10: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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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2일 수요일, 맑음

 

날씨가 맑은데도 눈은 뿌옇다. 손으로 눈을 비빌수록 더 안 보여 예전에 눈 수술을 한 곳, 서울시립동부병원엘 갔다. 김경일 원장님이 계실 때는 내 집 같았는데 누군가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 만으로 사람들의 친근감은 전혀 달라진다. 김 선생님이야 봄이 되어 물오른 가지처럼 고향에서 나무 심는 일에 신이 날 테니까 허전한 건 나 하나의 기분이리라.

 

사람들은 그분처럼 유능한 정형외과 의사가 땅을 파고 나무나 심고 있다고 인재가 아깝다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훌륭한 의사는 훌륭한 농부도 될 수 있다. 사람이 몸을 놀려 땀 흘리는 모든 일은 보람이 있고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도 작은 평수이지만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다.



농사일이 미숙해선지 일주일에 두세 번 안질 끼가 있는데 오늘 의사 선생님은 흙이나 먼지, 꽃가루가 문제란다. 병원에서 눈 검사를 하고 안약을 받아 오니 걱정이 한결 줄었다. 앞으로는 안경만으로도 안 되고 수경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

 

영심 씨가 집들이를 한다기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함께 온 친구 숙연 씨가 생일이어서 내가 케이크를 사들고 갔다. 숙연 씨 언니와 또 다른 이웃친구가 와서 여자끼리의 밥상이 되다 보니 상훈아빠는 그야말로 방콕이다. 이렇게 보통 가정에서도 집들이 한다고 시엄니는 밖으로 내보내고 남편은 방콕으로 유배시킬 만큼 여성 파워가 커졌다.

 

숙연씨 언니는 6년 전 남편이 뇌졸증으로 쓰러졌는데 뇌파도 없고 듣기 말하기 보기 생각하기 모든 반응이 없는데 목 아래로는 내장 전부가 건강하게 살아 있어 저렇게 생명연장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면서, 처음에 안 보내드린 게 후회스럽단다. 우리가 신이 아니고 타인의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호스피스법도 나왔으니 우리 부부라도 저런 식으로 생명연장 안 받겠다는 서약서를 서둘러 써야겠다, 아니면 코와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서 인질로 삼아 없는 재산 다 앗아가는 행태가 벌어질 테니까.

 

구청 공원녹지과 공무원이 와서 쓰레기가 대대적으로 투척된, 마을의 한평공원을 둘러보고는, 공원을 만들어는 주는데 지속적 관리는 힘들단다. 예전 같으면 마을 사람들이 거들지만, 요즘은 공공근로를 시키라는 데는 주민의 속셈이 있다. 작년에 예상외로 많은 세금이 거쳤다니, 그 돈 좀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소리다.



주민이 공원관리를 못한다는 공무원에게 내가 공원을 만든다는 것부터 지속적인 관리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니 구청에서 당연히 관리를 하세요라고 한 마디 했다. 어제는 구청의 같은 부서 공무원이 공원을 내 손으로 치웠다니까 왜 아줌마가 치워요?’라고 했는데 공공생활에서 주민의 동참을 그렇게 폄하해서는 안 돼요라는 말도 일러주었다. 빵기가 곁에서 들었으면 만년반장엄마한테 또 한마디 했을 거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아까운 벚나무를 마구 흔들어 꽃비를 퍼부으니 그 꽃잎에 젖어 서러움도 잊는다. 아들은 가고, 아들이 남긴, 폭탄을 투하한 듯 한 흔적도 다 정리되고, 빨래마저 했으니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빵기는 비행기가 늦어 런던에서 일박하고 오늘 오후에야 집에 들어갔단다.

 

오후에는 나박김치를 담갔다. 우리가 한 통 먹기로 하고 올케언니네도 한 통 갖다 주었다. 언니는 폐수술에서 아직 덜 회복 되었지만 얼굴은 전보다 낫다. 언니가 살아남아야 할 유일한 이유가 아픈 손가락 같은아들 때문이라니 걔가 어떤 면에선 자기 엄마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효자인 셈이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찬바람 부는 언니네 골목을 돌아 나오며 그 골목길에서 저녁마다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렸을 긴 세월도 곱씹어보았다.

 

작은아들은 성삼일 전례를 도우러 로마에서 밀라노 관자테로 떠나는 길이라는 전화를 해왔다. 보스코도 판공성사를 보러 본당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스승예수제자수녀회 수녀님들이 정성스레 만든 케이크를 택배로 보내오셨다. 성주간이다, 꽃비가 내리는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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