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예수 부활 대축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4-16 01:00:44

기사수정



제1독서(사도 10,34ㄱ.37-43)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셨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인류와 우주 위에 세우신 주님이시라고 선포한다.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핵심은 -복음 선포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아버지로부터 모든 사람에 대한 전권(全權)을 받으셨다는 단언으로 간추려진다.


오늘 읽는 제1독서의 내용도 구전(口傳)으로 전승(傳承)되어 오다가 수집되어 사도행전 안에 수록된 선교(宣敎) 연설들 가운데 하나다. 베드로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 고르넬리우스와 그의 가족에게 예수님의 사명과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여 그들을 회개하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한다.


‘삼일 째에’라는 표현은 -원시(原始) 교리에 자주 나타난다- 죽은 자들의 일반적 부활에 관한 유다인들의 관념과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다인들에게 ‘삼일’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데 드는 기간과 여유를 가리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올바른 사람들(올바른 선택과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부활 과정이 시작되었다. ‘올바른 사람’인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부활하셨고, 아버지께서 그분께 새로운 백성을 인도할 사명을 맡기셨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히브리인들의 어휘 사용법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전능하신 개입(介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시편(117) 해설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 그리스도의 날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이 후렴으로써 회중은 구원의 기쁜 소식에 화답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나는 날(日) 안으로 들어가는 회중의 기쁨은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 계속 되풀이되는 알렐루야를 통하여 표현된다. 


제2독서(콜로 3,1-4) 해설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한 사람은 높은 데서 오는 것을 추구한다>


바오로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탈선을 앞에 두고 콜로새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유에 대하여 말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에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실재(實在) 속으로 들어간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높은 데서 오는 것이지 사람 스스로의 힘을 우상화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현세 생활은 ‘인간의 운명’이요 ‘영광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 그리스도다운 생활방식으로 끊임없이 변형됨으로써만 가치를 갖게 된다.



또는 (1코린 5,6ㄴ-8) 해설

<불의한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


유다인들은 파스카 축제 동안에 누룩이 섞인 빵을 먹을 수 없었다. 누룩은 불의에 물든 썩은 사회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속한 공동체들과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영원히 당신 피로 맺어 주신 파스카의 어린 양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누룩 없는 빵과 같다. 다시 말해서, 누룩이 나타내는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반죽 덩어리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로 우리 각 사람 안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해야 한다. 


복음(요한 20,1-9) 해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부활>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요한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한다.


부활 후에야 비로소 사도들은 어렴풋하게나마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도 몸소 당신에 관하여 자기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요한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맨 처음 빈 무덤을 발견하고 사도들에게 알린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주검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하면서 그 장소로 달려간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의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구약성경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도 깨닫는다.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이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생겨났던 것이다.


또는 복음(마태 28,1-10)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 주간 첫째 날 아침에는 인간과 생명에 관한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추진하시던 계획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길로서, 죽음을 통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이제 앞으로 예수와의 만남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믿음의 핵심(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펼치신 활동을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계속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런 적극적인 믿음만이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다. 그 모습은 번개처럼 빛나고 그 옷은 눈같이 희다. 경비병들은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천사가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고 그 위에 앉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죽이는 세력에 잡혀 계시지 않고 그 세력을 이기고 단죄하셨음을 가리킨다.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님의 시신이 거기에 없었다. 이때 주님의 천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한다. 그런 다음 여인들더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전하라고 명한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평화를 기원해 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죽이는 자들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사랑과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투쟁하라는 말씀이다. 


묵상


▲ ⓒ 최진


그리스도의 날이 주는 새로운 생명과 기쁨

그리스도의 날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 주 그리스도의 날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파스카(건너감)의 날을 지내는 회중은 환희에 넘친다. 하느님의 백성이 품은 온갖 메시아적인 희망은 이 환희로 집중된다. 해방에 대한 기대, 복된 땅으로 들어가리라는 기대, ‘주님의 위대한 날’에 정의(正義)가 회복되리라는 기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되리라는 기대가 그 환희에 집중된다.


이 날은 또한 아브라함을 기뻐 용약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이미 옛적에 이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우리는 이 날의 빛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지상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빛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이 새로운 시대는 지상의 시간 및 공간과 갈라놓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시공(時空)을 그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


‘주님의 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생명으로부터 길어내는 활력 안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날 안으로 불러 모음으로써 당신 안에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인간 운명과 우주 운명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하도록 하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움’이시다


사람은 ‘새로움’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로운 것을 가지기 위해서 뿐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현대인은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의 모든 노력은 참으로 근본적이고 되풀이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찾고 있는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참된 ‘새로움’이란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이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며, 모든 피조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늘 현존(現存)하여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그분 안에서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외적 인간은 바오로 사도가 ‘육체적 인간’이라고 정의한 인간으로서 ‘볼 수 없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인간이요, 그리스도의 현존과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이다.


외적 인간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 던져야 할 헌 옷과 같다. 새로운 인간이란 구원의 결실이요,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실현되고 그리스도 안에 그 원형(原形)을 둔 인간이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표현은 바오로가 은총이라는 신비스러운 실재를 나타내기 위해 즐겨 쓰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 우리의 새 생명이 그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가 부활의 영광 중에 밝히 드러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말한다(참조. 콜로 3,1-4).


“새로운 세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생활 방식, 우리 본성 자체의 변화(바뀜)가 드러났다”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귀에 울렸던 파스카(죽임을 당한 다음 부활로 건너감)의 기쁜 소식은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감격과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다. 과학문명과 기술문명을 갖춘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그 새로운 세계라는 것은 이기심을 극복하며 타인들을 위하여 희생을 감내하는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부활에 도달하는 ‘새로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슬로 단결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옛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난다.


새로운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기쁨을 노래한다


새로운 사람이라면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을 지닌 사람이란 신비(神秘)를 받아들이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기다림 속에서 세상에 새 몸을 가져다주는 사람, 파스카의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기쁨을 노래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고독을 벗어나서 모든 사람(인류 전체)과 친교(親交)를 맺고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맺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을 노래한다. 새로운 사람은 자기가 사랑을 믿을 수 있음을 노래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느 날엔가 완결되어 나타나리라는 ‘복된 희망’을 품고 정의와 평화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모든 사람이 그 나라의 국민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조국(祖國)인 하느님의 나라를 목적지로 삼고 그 나라를 시공(時空) 안에 실현하려는 새로운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파스카의 역사’, 증오와 분열과 전쟁에 죽고 사랑과 단결과 평화로 부활하는 파스카(건너감)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활 축일 아침에 성찬례에 모인 회중은 거듭 새 출발을 하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이다. 인류로 하여금 사랑의 일치를 회복하게 하는 누룩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새로이 다짐하는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독서·복음


제1독서(사도 10,34ㄱ.37-43)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셨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편(117)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제2독서(콜로 3,1-4)

<그리스도께서 저 위에 계시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또는 (1코린 5,6ㄴ-8)

<새 반죽이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없애십시오>


형제 여러분,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복음(요한 20,1-9)

<무덤이 비어 있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마태 28,1-10)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