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5일 화요일, 흐림
지리산 휴천재 양옆으론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 검푸르다. 태고의 숲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제나 저 솔밭이 그곳을 지켰으리라 생각했다. 우리 이웃에 살다 작년에 앞산으로 잠자리를 옮겨 누운 부면장님이 살아생전 말했다.
‘내 어렸을 때는 저 산에 갈나무만 있던 민둥산이었어… 소나문 잎을 긁어다 때고 나무도 베어다 때고, 한 겨울 지나면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긁어다 땠는지 속살이 훤히 다 보이는 민둥산이었어. 그래 겨울이면 함양장 가는 노루재와 등성이로 뻗은 샛길이 훤히 보였지… 전쟁 후 회초리 같은 소나무를 심고 못 베게 하니까 그것도 자라 숲도 따라 우거지고… 호랑이 꼬리라도 보일 듯 사람들 발길이 뜸해지자 산길도 어느 새 사라져 버렸어…’
우리가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줄 아는 분이라 혹여 당신이 돌아가셔도 저 소나무 숲이 살아남기 바라선지 당신네 문중산이라면서 그 소나무 숲을 우리더러 사라고도 했다. 휴천재 창밖으로 보이는 저 지리산을 몽땅 사들이느라(공짜로) 자금이 딸린다고 말씀드렸다.
밖에 나가면 지천인 쑥이나 한바구니 뜯어다 쑥떡을 만들어 자동차 본네트 위에 한 바탕 굴리면 송화떡이 되겠다. 차에도 방안 탁자에도 마루에도 노랑 송화가루가 뽀얗게 내려앉는 계절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걸레질을 해야 한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한반도가 난리다. 멀리 사는 미국이 항공모함 이지스함을 동해로 몰고 오며 일본과 전쟁놀이를 하고, 핵항모 칼빈슨호는 동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연합작전에 돌입했고, 핵잠수함 미시간호는 부산항에 입항했단다. 중국은 북한 국경에 엄청난 무기와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는 소문, 한미연합군이 38선을 넘어만 오면… 하고서. 러시아도 빠질세라 동해 깊은데서 핵잠수함으로 잠수놀이를 하고….
세계 언론이 금방이라도 한반도에 핵전쟁이 터질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정작 우리 국민들은 천하태평이다. 조중동이 아무리 ‘안보장사’를 해도, 자유당이 아무리 ‘북풍’을 부채질해도 서민이 눈 하나 깜빡 않는다. 지난 70년간 이승만부터 우려먹던 반공 논리의 모든 버전을 다 섭렵한 국민이라 관제언론이 제아무리 “이리가 온다아~~~” 소리쳐도 선거판이 뒤집히지 않는 듯하다. 공중파와 종편이 하다못해 ‘3당합당 비문연대’라도 추썩여보지만 그것 또한 동상이몽이고, 오늘 코스피가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만 저자들을 뻘쭘하게 만드나보다.
민초들은 안다, 전쟁 나면 이 반도 끝에서 도망갈 곳도 없으려니와(저자들이야 미국이 일본으로 소개시킨다는 8만 명 ‘친미 요인’에 들었을 테니까 안심하겠지), 혹시 핵전쟁이 나면 ‘살아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부러워하리라’는 진실(흐루시쵸프의 명언이던가?)을…
저녁식사 후 강 건너로 산보를 가 ‘서강대 연수원’ 있던 자리를 둘러보고 부면장 강바오로의 무덤을 찾아 주모경을 바쳤다.
그 위에 거창한 사과밭 자리도 연수원자리 주인이 사들여 거창한 포클레인으로 거창한 공사를 해서 산비탈이 거덜나는 중이었다. 휴천재에서 건너다보이는 앞산 중턱까지 모조리 그 사람의 거창한 단지가 된 셈이라 ‘혼자서 저 많은 땅을 무엇 하려나?’ 하고 묻게 된다.
우리는 단지 흙에서 생겨나, 땅을 잠시 빌려 살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뿐임을 바오로님의 무덤이 새삼 일러주는 어스름 속에 송문교를 건너오면서 바치는 저녁기도 중에 시편(49,12) 구절이 입속을 맴돈다. “사람이 땅들을 제 이름 지어 불렀어도, 무덤은 그들의 영원한 집, 세세대대로 살 곳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