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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기사도(騎士道)는 없어도 숙녀도(淑女道)는 차고 넘치는 동네
  • 전순란
  • 등록 2017-04-28 10: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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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7일 목요일, 맑음


거의 달포 간 서울 살이로 소홀했던 텃밭이 잡초로 몸살을 하고 있다. 겨울을 나면서 대부분 여름살이 풀들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처지로, 작은 텃밭이지만 잡초들의 정치구조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계획적이고 합리적이다. 각자가 등장할 시기와 사라질 시기를 거의 정확히 알기에 지체 없이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풀마다 안다. 다만 떠나기 전 모든 풀이 씨앗을 맺어 자기만의 고유한 유전자 비밀 데이터를 간직한 작은 캡슐들을 비밀 장소에 숨겨놓고서 생자필멸이라는 우주법칙의 부름에 지체 없이 온몸으로 대답한다. 오늘도 바랭이를 뽑고 난 자리에 아주 작고 하얀 씨앗들이 “우린 당신네 꼼수를 격파했지롱” 하고 깔깔 웃으며 흙속으로 숨어든다. 저것들이 다 싹을 피워 올리면 나는 죽음이다.



잡초라고 억울하게 뽑히면서도 씨앗을 뿌리며 풀이 웃는다 


그런데 저것들이 잡초라고 뽑히며 억울해 하는 사이에 늘상 보호를 받는 풀들이 있으니 작년에 뿌렸던 들양귀비, 수레국화, 돌산갓, 해바라기, 파슬리, 코스모스, 공작, 신선초, 참나물, 금송화, 매발톱 등등. 이것들이 세력을 키우고 빈터를 가득 채워 잡초를 막아내도록 몇 년째 작전을 펴는 중인데 제법 성공이다.


오늘 드물댁을 놉으로 얻어 함께 풀 뽑자고 불렀는데 아줌마가 8시가 다 됐는데도 안 와 애를 태웠는데 전화를 받느라고 늦었단다. 동네에 혼자 사는 할메들의 생사여부를 자손들이 알아보는 방법은 전화다. 전화해서 대답이 없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여간 난리가 아니란다. (내가 아침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는 것도 같은 사유다.) 지난번 문정상회 아줌마가 밤새에 돌아가셨을 때도 전화를 안 받자 아들이 이웃 아짐더러 집에 좀 가보시라고 부탁하여 빨리 알아냈다. 생사확인 차 걸어오는 아들 전화 딸 전화 받느라 늦었다니 할 말이 없었다.


부추를 한아름 베다 다듬어 스.선생네 갖다드리고 


아줌마는 호미로, 나는 낫으로 뿌리 채 잡초를 뽑아냈다. 때를 놓치고 씨를 마구 뿌려대며 앙탈하는 풀을 뽑다보니 손가락에 물집까지 잡혔다. 남을 괴롭히면 내게도 아픔이 온다. 손님 신부님 오신다고 점심약속이 있어 내가 일어서니까 아줌마도 허리를 편다. 당신은 날이 뜨거우면 혈압이 올라간다며 집에 간단다. 동네 아짐들이 그니를 놉으로 안 부르는 이유다. 우선 주인이 안 하면 혼자는 안 하고, 하기 싫은 일은 만금을 준다 해도 마다하고, 할 만큼 하다 가버린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니에게 어떻게 일을 시키나 온 동네가 구경을 한다. ‘하고플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하기 싫음 관두세요’가 내 고용정책이다.


내가 허리를 펴고 텃밭에서 나오니 11시 30분. 30분 안에 점심 준비를 하자니 시간도 부족하고, 신부님도 매일 교우들이 가져다 드리는 두릅이나 엄나무 순을 삶아 초장 찍어 초식만 하는 게 요즘 메뉴일 테니 차라리 함양 샤브향에서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식당이 단체손님으로 가득차 개인손님은 안 받더라는 신부님 전활 받고 ‘꽃마름’이라는 데로 자리를 바꿨는데 젊은이들 취향의 샤브샤브라 신부님은 좋아했다.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이야기가 양념과 반찬이 되어 재미있었다. 언제보아도 듬직하고 성실한 모범 사제다. 오전에 우리가 아는 춘천교구 젊은 사제 한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셔 어제 장례를 치렀다는 얘기를 들은 뒤여서 신부님이 더 귀하게 보였다.


오후에는 생명연대의 휘근씨가 지방언론의 PD와 함께 휴천재에 와서 보스코와의 인터뷰를 녹화해갔다. 문정댐 반대운동의 일환이다.



나와 드물댁은 늦게까지 밭을 매고, 보스코는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서 쌓아 말린 배나무 가지를 끌어다 이웃집 가밀라 아줌마네 마당과 드물댁 마당에 쌓아주었다. 고사리 뜯어다 데칠 때 불질하라고… 가밀라 아줌마는 남정네한테, 그것도 교수님께 그런 허드렛일을 시켜 죄송하다며 산에서 막 끊어온 두릅을 한 아름 가져 왔다. 이 동네엔 기사도(騎士道)는 없지만(예외: 강인규씨) 숙녀도(淑女道)는 차고 넘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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